애니메이션 “시끌별 녀석들(うる星やつら)”을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유튜브의 퓨처 펑크 음악 업로드 채널 ‘Artzie Music’에 업로드된 음악 “BABYBABYの夢”를 통해서였다. 2021년 당시 유튜브는 ‘lo-fi hiphop music’을 위시한 ‘일할 때 듣기 좋은 업무용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일본의 과거 애니메이션 소스와 합성한 콘텐츠를 업로드하는 국내외 채널로 넘쳐났다. “가볍게 듣기 좋은 시티팝”, “OOO 감성 음악 플레이리스트”와도 같은 타이틀을 내걸며 음악의 옷을 입은 옛 일본 애니메이션 소스의 리터치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래서였을까. 2022년 1월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데이비드 프로덕션(David Production)’은 일본의 국민 만화 “시끌별 녀석들”을 근 40년에 걸친 세월 끝에 리부트한 애니메이션, “시끌별 녀석들 2022(うる星やつら 2022)”를 TV 포맷으로 방영하겠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과연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은 “시끌별 녀석들”의 거대한 위상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원작이 처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1981년처럼, 팬들의 우려 속에 “시끌별 녀석들 2022″는 2022년 10월을 기점으로 일본의 방송국 ‘후지 텔레비전(Fuji Television)’에서 기념비적인 첫 방영을 시작했다.
일단 시작하기에 앞서, 글의 방향에 대해 양해를 구하려 한다. 본 글을 작성한 필자는 원작 애니메이션이 방영을 시작하던 시기인 1981년을 경험하지 못한 90년대생이며,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을 통해 원작의 위상을 경험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작의 그것보다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이 지니는 가치를 조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필요에 따라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끌별 녀석들”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원작의 언급이 적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실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시끌별 녀석들 2022″가 40년의 세월을 지나, 2024년의 시점에서 무엇을 기점으로 사랑받게 되었는지, 소위 ‘옛날 애니메이션’의 리메이크가 현세대의 관점에서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지 낱낱이 파헤쳐 보자.
원작의 셀 화소를 넘어, 디지털 이미지로
영상 콘텐츠, 무엇보다 TV를 중심으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간판은 다름 아닌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다. 가장 효과적으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만큼, 오프닝과 엔딩은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끌별 녀석들”이 근 40년의 세월을 넘어 새롭게 리메이크된 만큼,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의 오프닝은 원작의 셀 화소를 넘어 디지털 이미지로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 새롭게 재편되었다.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 뒤에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원작 캐릭터의 비주얼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원작, “시끌별 녀석들”과 신작인 “시끌별 녀석들 2022” 안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캐릭터, ‘라무(Lum)’는 어떤 모습일까? 그 질문에 있어 우선 가장 먼저 연상될 답변은 캐릭터의 화소 속 색채가 화려해지고, 풍성해졌다는 것일 테다. 원작의 라무는 ‘모에(Moe)’[1] 열풍의 효시로 평가받는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2024년인 지금 다시 복기해 본다면 옛날 애니메이션의 향기를 풍기는 구식 캐릭터로 여겨진다. 시대의 한계로 인해 머리카락 색채의 반사광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점, 애인을 빼앗는 역할로 고안된 화려한 화풍의 악역임에도 일차원적인 색채로 디자인되었던 점 등이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의 오프닝에서는 과거의 단점이 보완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의 곁을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원작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팬들이 달가워할 점은 바로 원작의 요소와 현세대의 밈이 적절히 반영되었다는 것. 스마트폰 세대인 2024년, 남성 주역 모로보시 아타루(Ataru Moroboshi, 이하 아타루)의 스마트폰 속 작은 화면에서 살아 숨 쉬는 라무와 라무 친위대 군중들이 펼치는 오타게 댄스, 그리고 컷 신으로 디자인된 라무가 컷 밖에서 빠져나와 신세대의 아타루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원작을 사랑하는 팬들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신세대의 팬들에게는 원작의 진입 장벽을 허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작 연출과 신작 연출의 화합은, 후술할 문단에서 더욱 심화되며 “시끌별 녀석들 2022″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눈길을 끄는 헤딩 타이틀, 그리고 일러스트레이션 요소
오프닝과 엔딩이 프로그램의 간판이라면, 부제 개념에 가까운 헤딩 타이틀(Heading Title)은 향후 이어질 이야기를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대다수 애니메이션이 오프닝과 엔딩에 최선을 다하지만, 헤딩 타이틀은 활자로 대체하거나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그 대신 각색에 힘을 쓰거나, 캐릭터 디자인에 비중을 높이 두는 등 대안을 마련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그 시점에서, “시끌별 녀석들 2022″에 쓰인 헤딩 타이틀은 다소 흥미롭다. 매화마다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헤딩 타이틀을 선보이고, 약간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가미하기도 하는 등, 좀 더 ‘디자인’의 영역에 가까운 접근을 보인다. 헤딩 타이틀 연출은 오프닝-헤딩 타이틀로 이어지는 내용의 일관성을 통일하게 만들며, 약 24분 가량의 분량을 1부와 2부로 나누어 배당한 신작에 있어 일종의 분기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끌별 녀석들 2022″의 제작사 데이비드 프로덕션은 그 분기점을 눈에 띄게, 화려하게 디자인한 방향성을 선보였다.
그리고 원작에 비해 한 가지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다. 바로 ‘SD’ 캐릭터 디자인으로 비롯된 데포르메(Deformer)[2]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 이러한 묘사는 원작 만화의 IP를 활용한 미디어 믹스(Media Mix) 혹은 제품에 주로 사용되는 묘사 기법이지만, “시끌별 녀석들 2022″는 본 애니메이션에도 ‘SD’ 캐릭터 아트를 이용하는 것은 물론, 이를 연출로서 사용하며 정제된 작화와 시대를 앞서간 캐릭터 디자인을 무기로 내세운 원작에 비해 또 한 가지 새로움을 더했다.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에 걸맞는 연출, 그리고 각색
지난 6월 20일 자로 완결편 “보이 미츠 걸 – 생떼 부리는 I Want You” 편이 방영되며 2년간의 연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시끌별 녀석들 2022”.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미술과 디자인 면에서 호평을 받는 리메이크 작업이지만, 유독 각색과 연출 면에서는 평가가 엇갈렸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하나.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의 종합적인 제작은 과연 성공적이었을까?
“시끌별 녀석들 2022″의 제작과정은 그 시작부터 애니메이션 업계의 거물을 섭외하며 초호화 캐스팅 라인업을 선보였다. 업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스타 성우인 ‘우에사카 스미레(Sumire Uesaka)’와 ‘카미야 히로시(Hiroshi Kamiya)’의 주연 발탁부터, ‘하나자와 카나(Kana Hanazawa)’, ‘하야미 사오리(Saori Hayami)’ 등 조연들 또한 면목이 화려하며, 여기에 더해 조연출로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機動戦士ガンダム 水星の魔女 )’의 메카니컬 디자인(Mechanical Design)을 담당한 ‘제이엔티헤드(JNTHED)’도 배정되며 주조연 할 것 없이 현대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를 주름잡는 유능한 디자이너, 성우와 작가 등이 배정되며 팬들의 기대를 한 층 끌어올렸다.
배역들의 열연 끝에, 훌륭한 완성도의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지만 한 가지 지적되는 부분은 원작의 에피소드 각색이었다. 원작의 경우,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총 218화에 장기 연재 애니메이션이지만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은 예산과 제작사와의 사정 끝에 2기 4쿨. 총 46화에 달하는 원작의 약 1/4을 압축한 분량이었으며, 그렇기에 원작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성장, 풍부한 감정묘사가 생략되어 다소 급전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맹목적인 사랑을 원하며 사랑을 쟁취하는 것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의 라무. 그리고 오직 여자만을 밝히며 여자들에게 추태를 부리는 지구 최고의 문제아 아타루가 주요 에피소드를 통해 성장하고, 그들이 처음 만났던 인연인 ‘지구를 건 술래잡기’를 통해 오해를 해결하며 진실된 사랑이란 무엇인지 해답을 주었던 원작의 방대한 시나리오가 몇몇 에피소드들을 배제하며 설명이 생략되어 캐릭터들의 오역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원작에서 인기가 많았던 “그대 떠난 뒤”, “라무, 소가 되다” 등의 굵직한 에피소드들은 모두 수록됐다. 그리고 “하트를 잡아라”, “최후의 데이트” 등 리메이크 애니메이션에서 각색에 성공한 에피소드 또한 있기에 이러한 호오 속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겠다.
필요에 따라 분량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제작 사정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프로덕션은 원작의 유머 요소들을 더욱 코믹하게, 하지만 진지할 때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각색을 통해 원작의 그림자를 벗어나려 했다.
원작 만화의 최종장이자 극장판 완결편으로 제작된 에피소드,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각색 부분을 살펴보자. 지구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 수정구슬을 활용하는 부분에서 수정구슬이 던지는 농담은 팬들에게 너무 진지해지지 말라고 조언을 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화에서 라무와 ‘루파(RUPA)’가 지구의 운명을 건 마지막 술래잡기를 빌미로 아타루에게 선전포고하는 장면은 BGM과 함께 최종화의 엄숙함이 감돈다.
“보이 미츠 걸” 외에도, 신작 기준 1기 19화 2부에 배정된 에피소드 “주정뱅이 부기”의 각색과 연출 또한 인상 깊다. 인간과 다른 체질을 가진 라무가 우메보시를 먹고 취해 늘 그러듯이 소동을 벌이는 모습을 그린 해당 에피소드는 취기가 오른 모습을 머리카락을 포함하여 붉은 톤의 채도로 표현했다. 볼이 붉어지는 표현, 그리고 음악을 활용한 초현실적인 연출이 돋보이던 원작의 에피소드와는 다르게 신작에서는 원화에 더욱 집중한 모습이다. 이처럼, “시끌별 녀석들 2022″는 제한된 분량 안에서 원작의 장점을 캐치하려고 했으며, “라무, 소가 되다”와 “주정뱅이 부기” 와도 같은 몇몇 에피소드에서 특기할 만한 연출을 보여주는 등 신작만의 장점 또한 충분히 어필하고 있다.
음악, 그리고 마무리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총 4부로 나누어진 분량 덕에 “시끌별 녀석들 2022″의 OST 또한 각 쿨의 오프닝과 엔딩 8곡 그리고 보너스 트랙 2곡을 포함한 총 10곡의 볼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애니메이션 OST를 담당하는 일본의 음악 기획사 ‘소니 뮤직(Sony Music)’의 산하에 만들어진 프로젝트 ‘메종데(MAISONdes)’가 전곡 제작을 맡으며 애니메이션 연출에 여운을 더했다.
OST는 일반적인 J-POP으로 구성됐지만, 그중에서도 특기할 점이라면 극히 아름다운 가사다. 원작과 신작을 관통하는 대주제인 “변하지 않는 사랑”을 주제로 개사한 악곡들은 “시끌별 녀석들”의 영원을 약속하거나, 정말 아쉽지만 결국 끝나야만 하는 애니메이션의 여정을 노래하는 시적 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원작의 간판 OST인 “라무의 러브송(ラムのラブソング)”, “지구는 큰일이다!(宇宙は大ヘンだ!)”에서 드러나는 80년대 일본의 여유로움에 비해, 시기상 마지막 리부트에 가까운 “시끌별 녀석들”의 IP를 추억하는 아련함이 돋보이는 가사는 애니메이션 외적으로 팬들에게 큰 임팩트를 선사했다.
결국 끝을 노래함에도, 영원히 변하지 않음을 약속하는”시끌별 녀석들 2022″. 지난 2018년부터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를 강타한 “애니메이션 리메이크” 작업에 있어 “시끌별 녀석들 2022″는 무엇을 시사하고 있을까. 원작과 신작의 세대를 넘어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보답하기 위한 제작사의 과제는 무엇일까. 소학관(Shogakukan) 100주년을 맞아 만들어진 리메이크 애니메이션, “시끌별 녀석들 2022″는 그 해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 Urusei Yatsu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