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음악, 예술계를 특정 분야를 불문하고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감각적인 작업물을 뽐내는 창작자가 넘쳐나는 지금의 서울은 가히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았다 할 수 있다. 창작이란 누구나 뛰어들 수 있는 영역이면서도 생계와 결부되는 순간부터 제 아무리 서울을 터전으로 하는 토박이들 조차 그 안에서 자리 잡기 녹록지 않다. 하물며 머나먼 이국 땅으로 흘러 들어온 이방인이라면 어떻겠는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꽃 피우는 창작자들이 있기에 현재의 서울은 활력을 띈다.
로컬 신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네 명의 외국인 여성 착장자를 만나 그들이 왜 서울을 예술적 비전의 무대로 삼았는지, 또 그 안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물었다. 새로운 터전에 자리 잡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찾아 진솔한 대화를 나눴으니 함께 귀 기울여 보자.
Naomi – 페인터/모델
당신은 누구인가, 서울에 온 지는 얼마나 됐나.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고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는 나오미다. 작년 9월에 왔으니 10개월 정도 된 것 같다. 시카고에서 학사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는데 젊은 시절을 그곳에서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 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 서울이 떠올랐다. 무작위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서울로 오기까지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진 느낌이다.
외국인 창작자로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 여정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듣고 싶다.
2022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그전까지 다른 아시아 국가를 방문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큐레이팅 작업을 통해 알게 된 따뜻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리고 작년 봄에 두 번째로 서울에 오게 됐다. 몇 주 동안의 여행이었는데, 혼자서 서울의 많은 부분을 경험하며 지금의 에이전트도 만났다. 이때 만난 친구들과 보낸 시간들이 정말 좋았고 내게는 많은 영감이 됐다. 서울로 이사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여행이 나를 서울로 이끄는 강력한 원동력이 됐다.
지난 1, 2년 동안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이 학생에서 어떻게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는지 유심히 지켜봤다. 지혜로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고 사려 깊은 친구들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친구들을 만나 다양한 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나도 이들처럼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다양한 회화와 조형물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데, 작품에서 주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있다면?
주로 그림을 그린다. 종이나 평평한 인쇄물에 연필을 칠하는 거다. 학위를 마친 2021년쯤부터 이런 작업을 해왔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5살, 6살부터 미술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는 창의성보다는 선생님이 제시하는 이미지를 따라 그리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시카고 미술 대학에 다니면서 좀 더 다양한 작업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판화를 전공하면서 에칭, 석판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회화과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건강도 좋지 않았고 자존감이 낮았기 때문에 그때의 내 상황, 젊은 여성에 대한 기대, 여성의 실제 삶을 좌우하는 권력 구조에 관련된 작업을 주로 진행했다.
연필의 속도와 약간은 베일에 싸인 듯한 특성을 높게 평가하는데, 그 점이 매체로서 많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게 내 최근 작업에서 연필을 볼 수 있는 이유다. 예전 작업과 비슷하지만 요즘에는 개념적 측면에서 덜 성별화되어 있기도 하다. ‘도덕성’과 ‘올바른’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왔는데, 내 삶을 오고 가는 친구들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감탄, 사랑, 질투부터 피로, 냉소, 무력감까지 그 속에서 나타나는 감정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누가 옳은가? 이것이 바로 자유인가?”
한국으로 오기 전 예술 혹은 문화적 환경에 어떤 기대를 품었었나. 현재의 서울은 기대를 충족하는 것 같은지.
서울로 이사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이들을 통해 이곳에서 퍼포먼스, 영상, 설치 작업 등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작업물의 다수가 기성품 혹은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가운 느낌도 들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이런 작품을 경험했을 때 일종의 뚫리지 않는 무언가의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인지 서울에 오게 된다면 감정이 메마른 작업을 많이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내가 틀려서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어려운 점이 있다면 역시나 한국어다. 작품을 설명하는 텍스트나 보도자료 등을 읽지 못해 곤란할 때가 많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니 곧 극복하길 바랄 뿐이다.
창작에 대한 열망이나 비전과 직업적 혹은 사회적 성공의 욕구가 충돌할 것도 같은데, 이 양극단의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나.
이런 문제에 대해선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진심으로 아끼는 작품을 만들면 다른 사람도 관심을 가질 거라 믿는다. 그러니 스스로를 작업적으로 밀어붙이고 스튜디오에서의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한다면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거다. 적절한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는 데는 운이 따르지만 우선 적절한 장소에 도달하기만 하면 사람들을 설득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들도 내가 내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끼기 쉬워지니까. 적절한 사람을 만나는 건 운의 문제지만 확률을 높이기 위해 오프닝이나 행사에 참석하려 하기도 하지.
궁극적으로 모든 일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작품을 만든다. 나와 내 일 사이에 애정 어린 관계를 형성하고 일을 하며 나와 관계 맺어 온 사람들을 아낀다. 금전적인 성공을 우선순위에 두는 건 너무 위험하다. 물론, 내가 특권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 실제 내 직업 특성상 많은 시간을 생각하는데 보내야 하니까.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는 생계를 위해 카페와 가게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 스튜디오로 향하는 삶을 살았다. 작업과 돈을 한꺼번에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분리된 생활 방식을 훨씬 선호하긴 한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여성 아티스트로서, 한국의 창작 분야에서 꿈을 이루고자 하는 당신과 같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대부분은 우연한 기회로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선뜻 뭐라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모두가 다 하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도 “자신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 말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 외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파악한 후에 선택을 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통제할 수 없는 걸 이해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게 된다.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그렇겠지만, 한국이 아닌 미국에 산다면 그 요소들이 다를 테니까.
Sarah – 사진작가/시각 예술가
당신은 누구인가, 서울에 온 지는 얼마나 됐나.
프랑스 남부에서 온 96년생 사라라고 한다. 스위스 ECAL에서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사진작가, 예술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 2022년 10월 서울로 이주했다. 현재는 주로 패션 브랜드 작업을 하고 있다. 내 작업은 허구와 현실 사이의 세계를 탐구하는 기괴한 캐릭터를 창조해 내는 데 초점을 둔다.
외국인 창작자로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 여정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듣고 싶다.
스위스에서 직장을 그만둔 후 유럽 밖의 새로운 시장을 탐험하고 싶었다. 당시는 미국으로 갈지, 중국으로 갈지, 일본으로 갈지 여러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가 팬데믹 시기였기 때문에, 비자를 받기 가장 쉬운 곳이 한국이었다.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비록 예기치 못한 선택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완벽했다. 한국은 내가 가장 많은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니까.
한국 예술 업계에 새로이 발을 들였는데, 어떤 두려움 혹은 불안과 마주했나. 이런 불안이 작업을 접근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외국인 여성으로서 겪은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고.
작업 과정에서의 잘못된 의사소통이 최종 결과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기에 이 부분이 가장 두렵다. 촬영을 위해 가능한 많은 준비를 하는 편이다. 많은 레퍼런스와 내 작업 방식을 신중하게 클라이언트에게 설명한다.
한국에서 일하는 건 다른 곳과 똑같다. 업계는 여전히 남성적이며, 남성들을 더 신뢰하는 분위기. 수많은 고정관념과 잘못된 판단 속에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길을 찾는 건 어려울 수 있다. 이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자매애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서로를 더 지지해야 한다.
일종의 향수병을 앓아본 적도 있나?
매일매일이 쉽지 않다. 첫 해는 정말 괜찮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웠으니까. 밖에 나가 놀면서 친구들을 만났고, 업계 사람들과도 좋은 협력 관계를 이루면서 네트워킹을 많이 했다. 그런데 2년 차부터는 좀 더 힘들어졌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우여곡절도 많았고, 고향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맙게도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지지해 주고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에서 나를 건져 주는 친구들이 있어 괜찮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여성 아티스트로서, 한국의 창작 분야에서 꿈을 이루고자 하는 당신과 같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두르지 말고 최대한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야 말로 일로 꿈을 이루고 한국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FAKEDEEPLEE – DJ/크리에이터
당신은 누구인가.
반갑다. ‘FAKEDEEPLEE’라는 이름으로 DJ, A&R,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비디오그래퍼/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리아나(Liana)라고 한다. 2018년부터 한국에 살기 시작했고 그전에도 연세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파트너 에디(Eddie)와 함께 음반사 매스 컬처(A MASS CULTURE)를 설립했고,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는 DJ 그룹 언본사운즈(UNBORN SOUNDS)의 멤버이기도 하다.
외국인 창작자로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 여정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듣고 싶다.
대학에서 언더그라운드 유스 컬처와 한국 영화를 중심으로 한 영화/인류학을 전공했다. 1학년 때는 브라질에서 유스 컬처를 연구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수가 되는 게 목표였는데, 여름 인턴쉽 기간에 우연히 한 한국 영화를 보게 됐다. 그것도 추천 알고리즘에 우연히 뜬 영화를 말이다. 그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 엄청나게 구린 화질에 자막도 엉망이었지만 영화 스타일이 정말 눈길을 끌었다. 그 이후 100 편이 넘는 영화를 보고 전공도 영화로 바꾸고 한국어 학원도 등록했다. 한국적인 스토리텔링이나 문학, 시각적 이미지 등이 내게 주는 느낌에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한국적인 방식으로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고, 한국으로 넘어와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거다. 이후 랩 동아리에도 가입하고 케이크샵도 드나들며 언더그라운드 유스 컬처 그리고 클런 신에 매료됐다. 그때부터 클럽 사진도 찍기 시작했지.
당신을 이끌어 주던 멘토 혹은 커뮤니티가 있었나? 그들이 타지에서의 창작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내가 열아홉, 스무 살쯤 됐을 때 케이크샵에서 내가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사람, 린제이(Lindsay)를 만났다. 디제잉, 사진 등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는 외국인 아티스트로 모범을 보이면서 이방인, 퀴어 신을 위해 마련해 준 공간에 감사하고 있지.
다음으로는 디제이 풀(DJ Pool). 내게 디제잉을 알려준 사람이다. 2018년 친구로 만났지만 이후 멘토-멘티 사이로 발전했다. 스스로를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를 준 사람이면서 디제잉과 디제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줬다. 비록 그가 알려준 룰을 어긴 것 같이 느낀 적도 많지만 여전히 그에게 조언을 얻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가족 언본 사운즈. 끝없는 지지와 사랑을 보내주는 Aus10, Yungricain, Air Banks, Karl과 혼자가 아닌 공간을 만들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함께’다. 함께 성장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플레이하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과 벽도 함께 극복해 나가고. 언본 사운즈라는 가족은 내가 음악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일들에 두려움 없이 자유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한다. 가장 친한 친구들인 동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제이 그리고 내게 정말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
전반적으로 서울의 크리에이티브 커뮤니티에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클럽 안에서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도와줬고, 전시회를 열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줬다. Yann은 내가 그를 알기도 전에 소프(SOAP) 1층에 내 책을 비치해 두는 걸 허락해 주기도 했다. 서울에는 정말 다양한 장르의 클럽이 있는데,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건 큰 특권이다. 최근에는 Netgala, CO.KR, Arexibo에게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한국에는 인재가 너무 많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지금껏 진행한 작업 중 본인에게 의미가 남달랐던 작업이나 프로젝트가 있을까. 그를 통해 무엇을 배우게 됐나.
내가 한국에서 발간한 첫 번째 책 ‘문화’. 2018년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3개월간 한국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로컬 창작자 4명을 인터뷰하고 언더그라운드 클럽 신을 추적하는 나만의 ‘문화’를 정의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집에서 직접 사진전을 준비했는데, 시간이 더 필요해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도 취소했다. 그런데 문화를 탐구하고 기록하려면 돈이 들지 않나. 영화 티켓이나 클럽 입장료, 캠코더 테이프 비용, 인쇄비 등등… 그래서 한국에서 일도 시작했다. 아무튼 2018-19년에 찍은 사진이 내 서울 생활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물리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은 일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사를 계획하는 건 힘든 일이다. 덕분에 항상 급여를 밀리던 교사직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 고립된 시간이 내게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용기를 낸 소중한 경험이 됐다.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과 호흡하고 문화를 경험하기도 했고.
한국 예술 업계에 새로이 발을 들였는데, 어떤 두려움 혹은 불안과 마주했나. 이런 불안이 작업을 접근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처음에는 한국 사회, 커뮤니티에서 내가 어떻게 인식될지 두려웠다. 내가 왜 한국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항상 가졌다. 사람들은 내가 한국말을 하는 걸 듣고 “완전 한국인이네”라고 농담을 하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아니요,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일단 내가 한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 될 것도 아니기에 그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내 주변의 문화를 포용할 뿐이다. 나는 흑인 여성으로서 특히 눈에 띈다. 끊임없는 무시, 성적 대상화와 씨름해야 했다. 예를 들면 남성은 종종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이 나라는 걸 깨닫고 미묘하게 분위기가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어려움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두려움 없이 존재하고 문화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어떤 것과도 내 가치를 타협하지 않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여성 아티스트로서, 한국의 창작 분야에서 꿈을 이루고자 하는 당신과 같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냥 해라.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스스로의 길을 창조하고 통제하면 된다. 옳고 그른 길이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면 되니까. 반드시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으니 혼자 구석에 있으려 하지도 말고 더 빛났으면 좋겠다. 나 스스로도 이 점을 더 빨리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문이 닫혀 있거나 공간이 없다고 느껴지면 나만의 방을 만들어 보는 것도 방법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집착도 하고 강해져야 한다. 동시에 자신이 왜, 어떤 이유로 지금 작업을 하는지 기억해야 한다. 물론 도덕적으로도. 스스로가 누구이고, 무엇을, 왜 하는지 확고하게 알고 있다면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거다. 만약 잃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이루고자 하면 방법은 있다.
Eva – 패션 디자이너/모델
당신은 누구인가, 서울에 온 지는 얼마나 됐나.
몰드, 점토, 태양을 좋아하는 에바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모델로 활동하고 있고 취미로 주얼리도 만든다. 그리고 개를 사랑하는 사람. 한국에 온 지는 2년 정도 됐다.
외국인 창작자로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 여정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듣고 싶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는 거, 독립적으로 새로운 삶을 일궈 나가는 스릴. 두 번째로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다. 한국 혼혈인 나로서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어 언어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마지막으로는 내 경력을 위해서다. ‘팝스러운’ 내 디자인이 서울과 잘 맞을 것 같았다. 전에도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집처럼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서울로 오는 결정이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타국에서 생계를 꾸린다는 것, 특히 예술 및 문화 분야에서 이를 이뤄낸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이런 길을 택한 데 스스로 의문을 품기도 했었나? 그렇다면 어떻게 의미와 목적을 찾았나.
한국에서 패션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의 대부분은 한국어에서 비롯된다. 딱 중간 수준으로 밖에 구사하지 못하니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한국 패션 업계에 몸담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늘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 한국어에 대해서는 늘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언제나 그랬고 지금 역시나 내게 가장 큰 좌절을 안긴다. 언젠가는 완전히 유창하게 말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간의 외로움, 향수병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은데.
확실히 향수병을 느끼긴 한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페이스타임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중에는 어차피 돌아갈 거라는 걸 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성취감을 느끼거나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을 거다. 이런 외로움이나 소외감은 실제 내 창의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여성 아티스트로서, 한국의 창작 분야에서 꿈을 이루고자 하는 당신과 같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신의 배짱과 생각을 믿고 따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