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2024년의 마지막 달이 찾아왔다. 열두 달 모두 같은 한 달일진대 왜 12월은 유독 짧게 느껴지는 건지,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다. 보낼 건 보내고, 맞이할 건 맞이해야 하는 법. VISLA 친구들 역시 새로운 물건으로 연말을 채웠다. 한겨울에 구매한 반소매 티셔츠부터 자식에게 물려줄 미리 산 음악 CD 등등 그들의 이유 있는 쇼핑 썰에 귀 기울여 보자.
윤태현 – 서태지와 아이들 [시대유감] 초판본, 서태지 [TAE JI] 앨범
나름대로 인생의 큰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반, 책, 피규어 등을 모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 먼 미래지만 언젠가 태어날 내 아이가 자라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을 때, 방구석에 박혀있을 아이에게 내가 모은 물건이 담긴 상자를 스윽 밀어 넣으면 그것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 자아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아빠가 몇십 년에 걸쳐 모은 소중한 것들이니 때려 부수진 않겠지… 이런 마음가짐으로 좋아하는 것을 모으는 사명감마저 느끼곤 한다.
그런 목적으로 구매한 서태지 정규 6집 미개봉 초판본, 서태지와 아이들 싱글 “시대유감” 초판본이다. 물론 음악이야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쉽게 들을 수 있겠지만, 보고 만질 수 있는 실물 CD 음반과 그 안에 담긴 아티스트의 “Thank to…”와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클릭 몇 번으로 이뤄질 수 없는 소중한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뉴메탈, 하드코어, 록 장르 음악에 사회 반항적 가사로 점철된 두 음반이지만, 폭 넓은 사운드 스펙트럼을 경험하기에 좋은 음반이다. 사춘기가 된 내 아이가 서태지의 음악을 들으며 반항하면 얼마나 멋진가. 가출할 때를 대비해서 “Come Back Home”이 수록된 4집 음반도 사놓았다. 아무튼, 망상은 이쯤 해두고, “시대유감” 음반에 실린 글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그래, 가는 곳마다 길이 될 수는 없을 거야. 내딛는 걸음이 힘들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여, 반벙어리가 되고 반귀머거리가 되어 쉽게 세상 놓여져 있는 길 위에 서 있고도 싶었지. 그러나, 길 밖 세상의 풍경은 지울 수가 없는걸. 우리 가는 길 -옮기는 걸음마다 새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다.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길 밖에도 세상은 있었다는 것이므로.
오욱석 – Stash x Nike Air Max 95 SP
어른이 되어 직장을 갖고, 돈을 버는 즐거움(아마, 괴로움이 조금 더 크겠지만) 중 하나는 어린 시절 자력으로 살 수 없었던 물건을 사는 일이 아닐까. 아마 꽤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내용일 텐데, 실제 우리 집에도 ‘야, 이건 어릴 때 못 샀으니 지금이라도 사야지’라는 마음으로 구매한 옷이나 신발, 기타 등등의 잡동사니가 적지 않다. 이른바 추억 소비. 사실, 당장에 필요 없지만, 괜한 보상 심리로 덜컥 사버리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이런 추억 소비에 속절없이 당해버려 그 기록을 여기에 남겨본다.
지금에야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유명세가 바래어졌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스태쉬(Stash)의 명성은 대단했다. 뉴욕 브루클린을 대표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지만, 사실 그 이름은 패션, 그중에서도 스니커 컬처를 통해 더욱 널리 알려졌으리라. 일개 학생이었던 나는 일본 잡지를 통해 스태쉬를 처음 접했고, 그가 전개하던 스트리트웨어 라벨 서브웨어(Subware)의 그래픽과 컬러웨이는 그래피티 문외한인 내가 봐도 꽤나 쿨해 보였다.
여기에 더해 당시에는 아티스트와 협업한 스니커가 그리 흔치 않았기에 그의 이름이 붙은 신발에는 당연히 프리미엄이 붙었다. 아무튼, 2003년부터 나이키(Nike)와 함께 무려 16켤레의 스니커를 발매했으니, 그 본업이 그래피티 외 스니커 신(Scene)에서의 영향력 또한 무시 못 할 수준이었음은 분명하다. 20년이 넘는 세월 선보인 여러 디자인 중에서도 스태쉬의 시그니처 블루 컬러를 적용한 에어 포스 1(Air Force 1)과 에어 맥스 95(Air Max 95)가 명작으로 손꼽히는데, 바로 그 스니커가 긴 시간을 지나 레트로 됐다.
그렇게 20만 원 돈을 주고 추억 한 켤레를 구매했다. 근데, 막상 받고 발을 넣어봄에 큰 감동은 없더라. 무엇보다 나름 야심 차게 변경한 어퍼 소재와 아일릿 디테일이 에어 맥스 95의 쫀쫀한 착화감을 방해했다. 설포에 지퍼 주머니는 왜 그리 넣는 건지. 컬러웨이도 2006년 쪽이 훌륭하다. 그 옛날 원판을 구매해 신었다면, 그 기분이 좀 달랐을까. 나만 그런 게 아닌지, 18년 만의 귀환이 무색하게 좀처럼 품절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세월이 야속하다는 말밖에는… 쓰다 보니 실컷 돈 쓰고 푸념만 늘어놓고 있다. 다가오는 2025년에는 추억을 조금 덜 소비하길 바라며, 2024년의 마지막 쇼핑 후기를 마친다.
박진우 – Psycho Active Brazil Frog Tee
옷걸이가 삼류인 데다가, 나이가 들면서 괴상하게 까탈스러워지니 마음에 드는 옷을 사기가 정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간만에 티셔츠를 두 장이나 구매했는데, 그 브랜드가 바로 MMA, 주짓수 등 격투 스포츠를 테마로 하는 ‘싸이코 액티브(Psycho Active)’다.
처음에는 히스토리컬하고 레어한 사진을 올리며 팔로워를 모으는 격투기 관련 아카이브 인스타 계정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뮤추얼 목록을 보니 포토그래퍼 케네스 카펠로(Kenneth Capello)나 UFC파이터 길버트 번즈(Gilbert Burns), 그리고 퍽트(FUCT)의 에릭 부르네티(Erik Brunetti), 4Worthdoing, 룩스튜디오(Lqqk Studio) 등 미국에서 간지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법한 업계 레전드들이 이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다. 게다가 개구리의 실루엣처럼 보이는 로고도 굉장히 멋졌다.
나 같은 디자이너 샌님은 아무래도 원초적이거나 본능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있어서, 도리어 그러한 것들에 큰 동경심을 품게 된다. 특히나 원초·본능류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허용된 것 중 가장 빡센 게 격투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사회적으로 통제된 ‘폭력’을 공식적으로 행하니 굉장히 자극적이다.
이 운영자는 멋진 사진을 참 잘 골라 올린다. 생사를 수없이 넘나든 광기의 눈빛과 짐승 그 잡채를 떠올리게 하는 몸짓의 파이터 사진 사이사이, 개구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티셔츠를 입고 훈련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섞여 올라온다. 그 와중에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브라질 컬러 조합의 티셔츠는 곧바로 인스타 프로필에 링크된 공식 판매 사이트로 인도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품절 상태였다가 최근 재입고되어 운 좋게 구매할 수 있었다. 이토록 특정 티셔츠가 갖고 싶었던 건 오랜만이다. 혹시나 내가 못 본 새 입고되었을까 생각날 때마다 체크했다. 이 멋진 상술에 어떤 방어 시도도 못 하고 몸을 맡겨버렸다.
‘왜 최근에는 사고 싶은 옷이 없었는데 이건 사고 싶었나?’ 하고 스스로 물어보니, 동경하는 장르에 얹어진 자연스러운 유니폼처럼 느껴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듯하다. 자연스러움… 자연스러움이란 뭘까… 연출된 느낌이 자연스러운 사람도 있지만, 난 아닌 것 같고. 정말 좋아하는 것과 함께 자연스러워지고 싶다. 너무 좋아해서 자연스러워지고 싶다. 아마도 그것은 진심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선웅 – From The Soundtrack To 28 Days Later – Remix Sampler
지난 5월에 런던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이전까지 해외는 일본만 세 번 여행으로 다녀온 게 전부였고, 심지어 내 영어 실력은 아주 형편없기 때문에 낯선 땅에서, 그것도 여행이 아닌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꽤나 두려웠다. 어느덧 7개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절대로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지만. 문화도 언어도 다른, 모든 게 낯선 환경에서도 어찌저찌 살아갈 수가 있겠다는 걸 느꼈던 10일이었으니까.
런던 도착 후 숙소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달리기였다. 런던 방문 전, 그냥 유명한 랜드마크 정도만 알아본 게 전부였기에 어중간하게 뜬 밤에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숙소 바로 옆에 템스강이 있었고 강을 따라 타워 브리지, 빅벤, 런던 아이, 테이트 모던, 세인트 제임스 성당 등 명소가 널려 있어서 야경을 스쳐 가며 달리는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는 몇몇 영화에서만 봤던 랜드마크도 있었기 때문에 이걸 실제로 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더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영화 장면 중에는 “28일 후”도 있었는데, 주인공 ‘짐’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아무도 없는 빅벤 앞을 서성이며 사람들을 찾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런데 역시 영화는 영화일 뿐, 런던에 있으면서 빅벤을 총 4번 지나쳤는데, 그때마다 인산인해,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기억하는 영화의 장면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대니 보일(Danny Boyle)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적재적소에 사용되었던 음악들 때문에 그의 영화 장면들은 뇌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트레인스포팅”에서는 언더월드(Underworld)의 음악이 흘렀던 ‘Junkie Limbo’ 장면과 엔딩, 그리고 “28일 후”에서는 성가가 흐르던 몇몇 장면과 처절했던 엔딩에서의 음악들이 특히나 인상 깊다. “트레인스포팅” OST 바이닐은 한국에서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지만, “28일 후”의 OST, 특히 “28일 후”의 모든 OST를 담은 바이닐 레코드는 전 세계적으로도 꽤나 레어하다. 예상치 못한 큰 지출은 출장 일정에 위험할 것이라, 대신 가장 인상 깊었던 곡인 “Texi”가 담긴 프로모션 바이닐을 구해보기로 했다. 이건 매우 저렴하니까, 또 런던의 유명한 인디 레이블 ‘XL 레코딩즈’가 이를 발매했던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국에는 한 장 정도 있을 것이라 예상하며 런던 여기저기 흩어진 레코드숍과 주말 벼룩시장 등을 쏘아 다녔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고 디스콕스를 통해 온라인 주문하여 최근에 받아 듣게 되었다.
“Texi”는 “성모송(Ave Maria)”과 바흐 “평균율 1권 1번”이 융합된 곡으로 극 중에서는 주인공 일행이 택시를 타고 시체 더미로 황폐한 런던 도로를 거닐 때 등장한다. 파괴된 세상에서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 음악의 등장에서 아이러니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던 터라 특히나 인상이 깊은 곡이다.
이 바이닐 레코드에는 “Texi” 이외에도 그 리믹스 버전, 그리고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An Ending”이라는 곡까지 총 세 곡만을 담고 있다. 때문에 집에서의 청취를 목적으로 구매했다기보다는 베뉴 어디선가, 혹은 ‘Break Time Music’ 등의 믹스셋에서 소개하기 위하여 구매한 레코드다. 종교적이면서도 숭고하기까지 하여 오프라인 베뉴에서 틀기에는 나름 큰 결심이 필요할 수도? 그러나 한 마디에 네 박자, 반복되는 아르페지오 패턴이라 여느 전자음악들, 특히 앰비언트 장르 음악과 믹스할 때 유연하다.
12월 3일, 삶의 평온을 깨는 사건이 터졌다. 곪을 대로 곪다가 터져버린 염증은 3주가 지났음에도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면은 복잡한 생각들에 사로잡힌다. 이 사태를 짐작하기라도 한 듯 적절한 때에 도착한 이 바이닐을 내 내면의 작은 희망으로 여겼다. 황폐한 도시를 비추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중심을 지켰던 이 곡처럼, 나 또한 이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장재혁 – Asics FCP301
정말 오랜만의 신발 구매다. 한참 오래전에 누군가 “룩의 완성은 신발”이라 했는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며 보니 그의 말이 맞더라. 아무리 잘 차려입어도 신발에서 삑사리가 나면 그건 망한 룩이고 아무리 대충 입어도 간지 나는 신발을 신으면 그건 흥한 룩이다. 그래서인지 한 번 고르기 참 어렵다.
신발장을 열어보면 정말 뭐가 많다. 한때는 컨버스만 색깔별로 모으던 시절을 지나 본인도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상스러운 신발만 가득해진 신발장을 보고 있자니 지난날을 괜시리 돌이켜 보게 된다. 아일릿 디테일이 강렬한 태국발 드레스 슈즈 하수바나키츠, 미래에서 온 실루엣을 자랑하는 토킹 어바웃 디 앱스트랙션(TALKIKG ABOUT THE ABSTRACTION)의 하이탑, 반짝이는 푸른색 어퍼에 에어를 장착한 토모 앤 코(Tomo & Co)와 핑거린(PHINGERIN)의 합작 슈즈… 꽤나 강렬한 아이템에만 끌리던 시절도 있었나 보다. 혹은 그냥 주목을 받고 싶었을지도.
아무튼 문제는 이 개성 강한 놈들 사이에서 슴슴하게 본인을 매일 같이 챙겨줄 녀석이 없었다는 거다. 왜 매일 페퍼로니 피자와 치즈버거만 먹을 수는 없지 않나. 가끔은 아니 실은 꽤 자주 한식 백반이 필요하니까. 더 큰 문제는 신발을 하나 사면 뽕을 다 뺄 때까지 신는다는 건데, 대개는 구하기 쉽지 않은 빈티지 녀석들을 데려오다 보니 상태가 최상급은 아니었던 지라, 어느 정도 신었다 싶으면 밑창이 터지든가 뒷굽이 말썽을 부리든가 항상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래서 이 녀석을 샀다. 아식스가 내세우는 안전화 ‘FCP301’. 왜 하필 이 신발이냐고? 사실 데패뉴 보고 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멋있는 안전화, 힙한 안전화 어쩌고 같은 어그로성 타이틀에 끌렸다 ㅋㅋ. 사실 옷이나 신발을 살 때 길에서 나와 똑같은 걸 입고, 신고 있는 사람을 마주치는 상상을 하며 절대 그것만은 피하자는 주의인데, 이 신발은 아무리 데패뉴에 나왔어도 그리 많은 사람들이 실제 구매까지 이어갈 것 같지는 않았단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화의 든든한 밑창을 상상하니 마음마저 든든해졌달까. 웅덩이든 뭐든 간에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나의 걸음걸이는 그렇게 더 당당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발의 둥근 앞코가 구매욕을 상승시켰다. 컬러는 레드. 데일리한 신발을 찾으며 이 붉은 신발을 고른 게 스스로도 아이러니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게 나란 사람인 것을… 그리고 레드 슈즈가 은근 여기저기에 잘 묻는다… 진짜다.
Editor│오욱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