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 BOO

몇 년 전 어느 날, 길거리를 걸으며 RP BOO의 [Legacy]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막 날씨가 차가워질 가을 무렵이었고 나는 모든 소리와 리듬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이 음악을 급속한 계절의 변화처럼 받아들였다. 과거로부터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순간.

풋워크(Footwork). 시카고의 거대한 유산 중 하나인 풋워크는 시카고 하우스에서 파생된 맥락인 게토 하우스(Ghetto House), 주크(Juke)와 연결되는 지역적인 장르이자 춤의 일종으로, 국내에도 내한한 바 있는 DJ 라샤드(DJ Rashad)에 의해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풋워크의 형성에 크게 일조한 파이오니어 중 한 명인 RP BOO의 업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비교적 라샤드에 비해 그 공과 평가가 덜 알려진 그 RP BOO의 [Legacy]를 들으며 라샤드의 그것을 들었을 때와 유사한 전율과 광기를 느꼈다. 정말로 독자적인 무언가. 수준 높은 예술은 그 자체로 많은 창작자에게 훌륭한 영감이자 유산으로 계승된다.

우리는 RP BOO의 두 번째 케이크샵(Cakeshop) 내한을 맞아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며 시카고의 짧지 않은 하우스 신(Scene)의 역사를 요약정리하듯 단숨에 해치웠다.


서울에 온 걸 환영한다. 몇 년 전 긱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그래도 며칠 서울에 묵는 것 같은데 날씨나 음식은 잘 맞는가?

날씨는 원체 신경 쓰지 않는다. 음식은 굉장히 맛있다. 다른 곳에서도 한국식 고깃집에 가본 적이 있지만, 역시 본토는 다르다. 환상적이더라. 가격도 저렴하고.

아시아의 이곳저곳을 투어했다. 각각의 나라와 도시에서 받은 좋은 느낌이나 특징은 무엇인가?

이번 투어는 일본에서 시작했다. 오사카, 나고야, 도쿄에 방문했지. 세 도시 각자 다른 매력이 있지만, 분주한 도쿄보다는 오사카가 더 맘에 들었다. 중국은 상하이, 베이징, 청두에 다녀왔다. 베이징에서 보낸 시간도 좋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방문한 청두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특히 청두에서 먹은 음식은 말도 못 할 정도로 좋았지. 서울은 아시아 투어의 종착지다. 지난번보다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서울의 여러 부분을 볼 기회가 있지 않나. 항상 아시아 투어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집에 돌아가기 전부터 이미 여행한 곳이 그리워진다.

우리는 오랜 당신의 팬으로서 가장 먼저 가벼운 궁금증부터 털어놓겠다. 왜 이름이 ‘RP BOO’인가?

처음에는 비 보이 쥬스(B Boy Juice)라는 이름을 썼다. 당시 나는 바이닐 레코드로 디제잉을 시작했고, 워낙 믹싱을 잘했기 때문에 B를 ‘Blending’의 앞글자에서 따왔다. Juice는 당시 내가 좋아했던 영화 “돌아온 이탈자 2(Juice)”에서 착안했지. 당시 시카고에 있는 디제이들은 전부 DJ를 이름 앞에 붙였다. 나도 하는 수 없이 원래 별명이었던 Boo 때문에 DJ Boo라고 불렸다. 그때가 한 93년부터 97년까지였다. 어느 날 형이 내게 새로운 디제이 이름을 주겠다고 했다. 근데 그 이름이 뭔지는 안 알려주고, 자꾸 질문만 하는 것이다.

“CD의 약자는?”-“Compact Disc지”. “VHS는?” – “Video Home System이지”.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형은 대뜸 테크닉스 SL-1200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뭐라고 불러?” – “턴테이블?” – “아니, 우리가 진짜로 부르는 이름으로”-“Record Player?”. 형은 나를 멈춰 세웠고, 그제야 이름을 알려줬다. “네 이름은 앞으로 RP Boo야. 여기서 RP는 레코드 플레이어의 약칭이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바꾼 이름으로 첫 파티에 노래를 틀러 갔을 때, 거기엔 DJ 라샤드, DJ 클린트 (DJ Clent), 매직 마이크(Majik Mike)도 있었다. 그날 나는 마이크를 잡고 청중을 향해 내 이름이 이제부터 RP Boo라고 선언했어. 그 뒤에 몇몇 사람이 RP를 이름에 붙여보려 했는데 끝내 실패했다. RP라는 이름은 우리 형이 준 이름이니까.

잠시만 당신의 유년기로 되돌아가자. 1970~80년대일 텐데 지금 시대와는 한참 다른 모습의 그 시절 시카고의 풍경을 좀 회상해 줄 수 있을까?

70년대 유년기를 회상해 보니 지금 세대 아이들보다는 자유로웠던 것 같다. 여름방학이면 항상 낡은 매트리스와 박스 스프레이를 갖고 놀았다. 매트리스에서 백텀블링 같은 것도 자주 했고, 폐타이어를 굴리느라 먼지를 한바탕 뒤집어쓰고 집에 들어올 때도 있었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는 그 일대에 건물이 좀 있었다고 하던데, 온통 공터뿐이었다. 듣기론 마틴 루터 킹 시위 때 건물이 많이 사라졌다.

그 시절 어떤 음악을 어떤 경로를 통해 들었나? 스포티파이는커녕 CD도 없던 시대였는데.

나는 기술의 발전을 몸소 겪으며 성장했다. 7, 80년대에는 휴대용 계산기, 아타리 2600, 전자레인지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그 맥락에 힙합도 있었다. 디스코, 펑크만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디스코, 펑크, 힙합 등 흘러나오는 다양한 음악을 흡수했다. 80년대에는 삼촌을 따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믹스를 들었다. 비디오 시대의 도래와 함께 MTV의 태동도 함께했다. 지금이야 너무 많은 통로를 통해 세계 각국의 음악을 듣고 장르에 대한 호불호를 표할 수 있지만, 그 당시 MTV를 통해 접한 음악은 아티스트의 인종과 국경에 상관없이 모든 음악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다.

좀 더 본격적으로 디제잉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지금은 유튜브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제법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데다가 한국에서는 대면 레슨 같은 경로를 통해 믹싱과 디제잉에 관한 스킬과 이론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했나? 눈으로 보고 훔쳐야 했던 건지?

1985년쯤 시카고 서부에서 남부로 이사했다. 그때 지금까지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시카고 하우스를 경험하게 되었다. 사실 고등학생 무렵에도 나는 부모님 덕에 모범생처럼 살았다. 하지만 학교 안에 있는 댄스 펑션(Dance Function)에서 호세 레이(Jose Ray)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디제이인줄 몰랐는데, 어느 날 그가 SL 1200과 바이닐로 음악을 트는 걸 보게 되었다. 난 늦게까지 남아 그와 대화할 기회를 노렸다. 그의 장비를 차에 옮겨 주면서 대화를 나눴다. 우리가 서로 세 블록 거리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되었다. 난 그의 집에서 디제잉을 배웠다. 호세의 지하실엔 장르 별로 잘 분리된 레코드가 정말 많았고 난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디스코, 펑크, 하우스를 바이닐로 믹싱하는 장면을 봤지. 그렇게 처음으로 디제잉을 배우고 음악을 틀게 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DJ가 된 이후에는 조금 더 여러 장르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테크노, 힙합뿐만 아니라 하우스도 틀었다. 올드스쿨 하우스보다는 카즈미어(Cajmere), 마이크 던(Mike Dunn), DJ 스푸키(DJ Spooky)나 폴 존슨(Paul Johnson)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트랙을 만들기 시작한 때는 언제였나? 레전더리 댄스 크루 하우스-오-매틱(House-O-Matics)과의 인연이었는지?

언젠가 한 DJ가 작은 드럼 머신을 들고 있길래 나는 그에게 이 장비를 어떻게 구했냐고 묻자, 그가 기타 센터(Guitar Center)에서 롤랜드 70(Roland 70)을 달라고 하면 된다고 답했다. 설명서 따위는 없었기에 패드를 한 번 눌러 패턴 하나를 녹음하는 방식으로 알음알음 시작했다. 심지어 나는 패턴을 복사해서 붙여 넣는 방법도 몰랐다. DJ 디온(DJ Deeon)에게 전화를 걸어 방법을 물어보니 2분 만에 해결법을 찾았다. 그렇게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지. 프로듀서로 처음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신에서 정말 어린 편이었고 훨씬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시절에 난 프로듀서는 아니었고, 하우스-오-매틱과 함께하는 디제이였다. 하우스 오 매틱에 소속되기 전에 나는 메가 무브(Mega Move)라는 댄스 크루에서 춤을 췄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우연히 학교 놀이터에서 스텝 댄스를 추는 몇몇 댄서를 보게 되었다. 나는 주로 시카고 서부 방식의 춤에 익숙했는데, 남부 시카고 출신이었던 그들은 완전히 색다른 레그킥을 선보이더라. 그 친구들이 내게 믹스테잎을 만들어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마침 장비를 샀던 나는 흔쾌히 합류했고, 93년도까지 메가 무브와 함께 하게 되었지. 당시 하우스-오-매틱은 시카고에서 최고였다. 기본적인 동작에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녹여내어 완벽한 경지에 올랐다. 처음 그들을 보자마자 꼭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하우스-오-매틱의 수장이었던 로니 슬론(Ronnie Sloan)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고, 나는 그에게 내 믹스테잎을 건넸다. 그는 멤버들에게 내 테이프를 들려주었고, 수년간 함께했던 멤버들은 전부 디온의 것이냐고 물었다. 로니는 오늘 만난 아이가 줬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30분 만에 하우스-오-매틱에서의 첫 긱이 들어오게 되었다. 두 번째 파티까지만 해도 놀러 온 사람은 몇 안 됐지만, 세 번째 파티는 대성공이었다. 거물들이 전부 모였던 그 파티에서 나는 완전히 무명이었지만, 덱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도대체 저 미친 디제이는 누구냐고 다들 물었으니까.

사람들이 시카고 신에 관해 말할 때 게토 하우스주크풋워크로 이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빼놓지 않고 말한다. 80년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하우스 음악이(이를테면 시카고 출신의 파이오니어 프랭키 너클스라든지) 시카고 DJ들을 거쳐 게토 하우스라는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낼 때 어떤 작당모의가 수반됐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일종의 시카고 정서에 맞춘 을 위한 변화처럼 들리기도 했다.

프랭키 너클스(Frankie Knuckles)가 조금 더 근간을 디스코에 두고 있다면, DJ 칩 E.(DJ Chip E.)가 시카고 하우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마샬 제퍼슨(Marshall Jefferson), 스티브 포인덱스터(Steve Poindexter)와 같은 디제이들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버전과 달리 파티에서만 들을 수 있는 플립 버전의 진짜 ‘게토 하우스’들을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이 DJ 론 하디(DJ Ron Hardy)가 진정한 시카고 하우스의 대부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디스코 트랙에 그만의 변주를 주는 방식으로 에딧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포인덱스터의 “Work That Mutha Fucker”와 카즈미어의 “Percolator”가 만들어지는 사이, 시카고 서부에선 재민 제랄드(Jammin Gerald), 하우즈 몬(Houz’ Mon), DJ 왁스마스터(DJ Waxmaster), 남부에서는 디온과 DJ 밀튼(DJ Milton)이 선구자 역할을 했다. 디온을 중심으로 남부는 좀 더 챈트를 기반으로 한 게토하우스였다면, 서부는 최고의 댄서들이 있다 보니 춤에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춤에 특화된 리듬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카고 풋워크의 태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거지.

97년, 98년이 되면서 파티 신은 격변을 겪었다. 더 많은 이가 풋워크를 하길 원했고, 물론 그 당시에도 풋워크 댄서를 위한 무브먼트가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배틀 클릭(Battle Clicks)이란 그룹이었다. 일반적인 루틴 말고 조금 더 색다른 걸 하고 싶어 했지. 하지만 03, 04년 무렵 배틀 클릭도 저물고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졌어. 그래도 몇몇 멤버가 비공식적으로 루틴을 소화했는데, 나도 언젠가 그 쇼에 함께 했었지. 갑자기 노래 한 곡을 틀겠다고 하더니,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전부 풋워크 댄스를 췄다. 우리는 거기서 미래를 발견했다. 그렇게 풋워크 신의 첫 번째 프로듀서 그룹이 탄생했다. 클린트 주도로 비트 다운(Beatdown)이 시작되었고, 클린트, 매직 마이크, 라샤드,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을 중심으로 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음악에 역동적인 변화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우리는 주로 디온, 밀튼 등의 게토하우스 샘플을 존경의 의미로 조금 더 빠른 박자로 다시 에딧을 만들었다. 그리고 4-5년이 지나 2008년이 되었을 무렵 마이스페이스(My Space)가 등장했고, 마이크 패러디너스(Mike Paradinas)가 인터넷 베이스의 레이블 형태였던 플래닛 무(Planet Mu)를 창설했다. 우리는 플래닛 무에서 [Bangs & Works Vol .1], [Bangs & Works Vol .2]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했지. 비로소 풋워크가 전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풋워크 댄스 신 역시 마찬가지다. 여전히 풋워크 댄스는 배틀에 특화되어 있지만, 이제는 영상으로 공유되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배틀 측면에서의 풋워크와 루틴 측면에서 풋워크는 조금씩 다르지만, 세계 각국에서도 이런 두 측면의 풋워크 댄스를 소화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고, 영국도 점차 발전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당시 당신보다 좀 더 앞선 세대나 비슷한 시기에 신에 있던 프로듀서들, 이를테면 디온이나 슬러고(DJ Slugo), 트랙스맨(Traxmen), 캐즈미어, 폴 존슨과 같은 이들과의 교류에 관해서도 듣고 싶다. 시카고의 클럽/댄스 뮤직에 관한 방향성이나 흐름에 관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시카고 남부의 게토 하우스 디제이들 중에는 디온과 밀튼과 함께 디제잉도 하며 교류를 나눴다. 클린트와 슬러고는 한 파티에서 동시에 만났다. 내가 음악을 틀고 있던 당시 클린트는 밀튼에게 저 새로운 디제이가 누구냐고 물었고, 밀튼은 그에게 나를 하우스-오-메틱의 메인 디제이라고 소개했다. 가장 자주 교류를 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클린트와 라샤드가 아닐까. DJ 펑크(DJ Funk), 밀튼, 디온 등은 레이브 신으로 넘어갔고, 당시 음악의 변화를 아무도 예상하진 못했다. DJ 스핀(DJ Spinn), DJ 떼즈(DJ Thadz) 등은 남부 교외를 중심으로 새로운 자리를 찾아나갔다. 그렇게 시카고 신이 분화되는 4, 5년의 시기가 오히려 관계를 쌓고 교류를 하기 좋은 시기였다. 나 역시 비트 다운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클린트, 라샤드와 꾸준히 연락을 이어갔다. 그 사이 [1]게토 테크니션(Ghetto Technicians)도 생겼고, 그들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파티에 함께하며 교류했다.

90년대 중반, 일반적인 하우스 템포에서 피치를 극단적으로 올리며 게토 하우스에서 주크로 이어지는 시카고만의 독특한 장르가 파생됐다. 그러나 주크라는 명칭은 단순히 장르라기보다는 시카고의 댄스 신을 정의하는 일종의 문화이자 은어처럼 들린다. 이에 관해 설명해 달라.

모든 춤과 음악을 포괄하는 토대는 당연히 게토 하우스다. 주크라는 단어는 오히려 디온과 밀튼이 레이브 신으로 떠난 뒤 생긴 단어지. 사실 주크는 일종의 표현법이다. 사람이 가득하고 에너지가 좋은 파티에 오면 이 파티는 “‘주크’하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표현을 음악으로 만든 데 일조한 사람은 DJ 갠트맨(DJ Gant-Man)과 “Let Me C U Juke”를 만든 DJ 푼초(DJ Puncho)다. 이미 게토 하우스가 업템포의 노래였기 때문에 주크의 Bpm 역시 여전히 130에서 140 사이에 맞춰져 있다. 주크를 장르로 아는 사람들이 많던데, 주크는 여전히 게토 하우스의 범주 안에 있다. 게토 하우스를 뒤집어 장르화한 건 풋워크다.

하우스에서 파생되었으나 좀 더 독자적인 리듬과 사운드를 품은 풋워크가 시카고를 중심으로 알음알음 전 세계의 프로듀서들 사이로 퍼져나가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라샤드, 스핀과 같은 당신의 다음 세대가 등장한 것으로 기억난다. 풋워크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리듬. 나는 집에 있을 때 내가 만든 트랙에 직접 춤을 춘다. 내가 춤을 출 수 있는 트랙이라면, 댄서들에게 곧장 실험해 본다. 스핀과 라샤드는 좀 더 에딧에 초점을 맞춘 편인 것 같다. 샘플을 자기 방식대로 변주를 주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샘플을 사용하는가다. 많은 사람이 그저 라디오에서 핫한 트랙을 샘플로 쓴다. 나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샘플을 사용한다. 내게 샘플링은 아티스트나 프로듀서를 향한 존경의 의미다. 물론 나만의 변주를 가득 담아야 한다. 이제는 메트로놈 프로그램이 워낙 보편화되어서 리듬이 너무 명료해졌다. 기술이 리듬을 죽인 셈이지. 샘플을 유심히 들어본다면, 각 샘플이 지닌 고유의 리듬을 발견할 수 있다. 기술이 범접할 수 없는 소울을 트랙에 담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트랙을 만들어도 결국 소울이 담긴 한 트랙이 판도를 바꾼다. 사람들이 베끼고 싶어도 베낄 수 없는 그런 소울이 담긴 사운드 말이다.

슬프지만 재능 있는 프로듀서 라샤드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와의 일화, 그가 제시한 비전이나 그와 나눈 풋워크의 미래 등 음악적인 비전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나와 라샤드는 꽤나 각별한 사이다. 그의 어머니와도 전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깝다. 그의 부모님도 나를 신뢰하고 있고, 나도 정중하고 각별하게 대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역에서 함께 자주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서부에 있으면 그가 남부에 있고, 그가 서부에 있으면 내가 남부에 있던 적이 많았지. 그래도 언제나 투어나 파티가 끝나면 꼭 전화기를 붙잡고 수다를 매일 떨었다. 심지어 내가 일하는 곳으로 자주 찾아오기도 했으니. 마치 어릴 때부터 정말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은 관계였다.

라샤드의 작업물은 정말 놀라운데 그중 하나가 바로 [No Edit Allow]라는 믹스테잎이다. 아마 누군가 그 테이프를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언더그라운드 중 언더그라운드일 것이다. 그 테이프에는 게토 하우스를 라샤드만의 창의력으로 재창조한 트랙으로 가득했다. 2013년 라샤드가 [Double Cup] 작업을 끝마치고 파트 2를 고려하고 있던 때 라샤드와 나는 우리가 서로의 작업물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 사이임을 인정했던 것 같다. 실제로 라샤드는 언제나 주변 지인에게 나를 두고 “RP BOO를 꼭 주목해라. 너의 모든 영감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사람이다. 진정한 자신만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줄 거야”라고 소개했다. 특히 테크라이프(Teklife) 멤버들에겐 나의 믹스가 어떻게 스토리를 형성하는지 주목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라샤드는 언제나 테크라이프를 포함해 주변인에게 “넌 날 이길 수 없어(You can’t beat me)”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유일하게 나에게만큼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다시 새로운 세대, DJ 매니(DJ Manny), DJ (DJ Earl), (Jiin)과 같은 걸출한 아티스트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들과도 어떤 커넥션이 있는지? 혹은 다음 세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

매니, 얼과는 지금도 꾸준하게 패밀리십을 유지하고 있다. 매니와 그의 사촌 DJ 커티스(DJ Curtis)는 파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프로듀서이기 이전에 풋워크 댄서로서 내게 스킬을 자주 보여주기도 하던 재밌는 친구들이다. 게다가 매니는 플래닛 무에 함께 소속되어 있기도 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다. 얼은 라샤드의 송캠프에서 만나게 되었다. DJ 필(DJ Phil), DJ 테이(DJ Taye), DJ 트레이(DJ Tre) 등 라샤드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디제이가 많다. 타소(TASO) 같은 경우 라샤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알고 지내게 되었지만, 생전 라샤드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LA 기반의 주크 바운스 워크(Juke Bounce Werk)도 빼놓을 수 없다. 제이 드라고 (Jae Drago), DJ 노이어(DJ Noir), 소닉 디(Sonic D), 쿠쉬 존스(Kush Jones), DJ 스위샤(DJ Swisha)까지. 그들을 만나게 된 것도 라샤드를 통해서였다. 그를 통해 알게 된 이들과 난 여전히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제이 드라고와는 이번 투어 돌 때도 이야기를 나눴다. 내게 새로 나온 고질라 영화를 꼭 보라고 추천하더라.

주크, 풋워크를 비롯한 시카고의 유산이 지역적/장르적인 한계를 넘어 진화, 발전하려면 어떤 것들이 유산으로서 계승되어야 하고 또 어떤 것들이 변화해야 하는가?

성장과 확장을 수용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의 등장 이후, 다른 인종과 국가에서도 풋워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킹 찰스(King Charles)라는 풋워커는 직접 다른 나라에 방문해 그 나라 사람들에게 풋워크 댄스를 가르치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 그를 통해 일본과 이탈리아의 풋워크 신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풋워크 신이 있는 나라들은 전부 찰스를 통해 배우거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배운 것이다. 심지어 인도에서도 시카고 풋워크가 발전하고 있다. 만약 정말 제대로 된 방법으로 풋워크를 배웠다면, 언제나 이 유산의 뿌리인 시카고 풋워크를 기억하고 계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비트다운의 유산과 뿌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주크 바운스 워크도 다른 풋워크의 무브먼트도 결국 비트다운의 시발점과 맞닿는 것이다.

당신은 아날로그부터 디지털까지 모든 시대를 통과하며 기술의 발전을 체험했고, 실제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음악에 매진하고 있다. 틱톡과 소셜 미디어, 인스타그램, 스트리밍 플랫폼이 익숙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전해줄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가?

틱톡을 통한 예술이라고 해도 결국 그 예술을 향한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만 춤으로서 어떤 육체적인 창의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덜 의식하는 것이 좋다. 너무 목을 맬 필요도 없다. 과거와 달리 현재에는 어떤 영광이나 명예가 쉽게 사라지는 시대다. 취미로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면 오히려 새로운 것들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의 과정 외에는 소셜 미디어를 너무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직접 대면하여 사람들을 마주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누군지도 모르는 대상이어도 괜찮다. 사람과 직접 상호작용을 하는 것만큼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없다. 결국 소셜 미디어는 비즈니스의 수단일 뿐이다. 디지털에 사로잡혀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선에서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한 번 미디어에 당신의 재능이 노출되었다면, 현실과의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뿌리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음악에 매진하면서 지겹거나 지루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순간이 여러 번 있었을 거 같다. 그런 모든 관습을 타파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걸 창작할 수 있는 스스로의 동기부여는 무엇인가?

나는 조금 더 내 음악이 더 많은 사람과 맞닿길 원했기에 비트다운을 나오게 되었다. 덕분에 내 음악이 다른 영혼을 가진 요소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더 역동적으로 작용한 셈이다. 사람들은 내게 도대체 이런 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왔는지 항상 물어본다. 난 언제나 세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사용하려고 노력한다고 답한다. 그저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히트 트랙 대신, 지금 내가 가진 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창작할 때는 생각이 많을 필요가 없다. 그냥 만들어 보는 것이다. 난 장르적 제약을 두지 않는 편이다. 언제나 새로운 장르는 등장하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 장르는 다른 무언가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않은가?

당신은 세 아이의 아버지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아이들은 당신의 음악처럼 또 다른 유산(Legacy)이 아닌가. 그렇다면 음악을 떠나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새로운 세대에게 계승되어야 할 중요한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사랑과 존중을 보여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존중, 친절, 겸손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 절대 서두르지 말라. 서두름은 나 자신을 이해할 시간을 주지 않고, 스스로 다치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다른 어떤 누구와도 다른 독보적인 것을 해왔고,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면 사람들이 당신을 전설(Legend) 혹은 전설적인 존재(Legendary)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여기서 두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자는 전설이 되기 위한 행보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자는 완료형 시제에 가깝다. ‘전설’이라는 것은 결국 그 신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나 혹은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존경과 찬사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될 수 있는 데는 다른 이들의 도움이 컸다. 언제나 그들에게 친절함을 베풀고 있으며, 내가 지닌 것들을 가르쳐서 다음 세대가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당신도 그런 위치에 오른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저께 함께 진토닉을 마실 때 당신이 언급한 새로운 ‘Boo Shoe’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정의하는 풋워크가 아니라고도 했다. 이것에 관해 말해줄 수 있을까? 곧 당신의 퓨처 플랜 같은데.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Boo Shoe’는 미래라는 점 단 하나뿐이다. 언젠가 공개할 때가 올 것이다. 물론 우리의 대화를 되짚어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Boo Shoe’의 시학이다.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는 ‘Boo Shoe’는 비밀로 지켜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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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권혁인
Translator │ 최현수
Photographer │ 전솔지

[1] 풋워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이블인 테크라이프(Teklife)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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