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한국의 민속놀이로 여겨지는 게임 스타크래프트(StarCraft)의 황금기였던 2000년대 초반. 당대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보여주는 화려한 컨트롤과 세밀한 전략을 따라가지 못해 섬멸전(Melee) 모드는 손도 못 대고 그저 구경만 했던 필자와 같은 초보 게이머를 위한 모드가 있었으니, 흔히 ‘유즈맵’이라 불리는 커스텀 모드가 바로 그것이다. 비슷한 시기, 스타크래프트 개발사 블리자드(Blizzard)의 또 다른 게임 워크래프트(Warcraft) 세 번째 시리즈에서 스타크래프트보다 더 자유로운 유즈맵 제작이 가능해지면서 게이머는 섬멸전과는 또 다른 재미의 다양한 콘텐츠를 골라 가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유즈맵은 유저들의 놀이터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섬멸전 모드는 1:1 대결 혹은 2:2 대결에서 상대의 전략을 미리 파악하고 그 상황에 맞는 판단을 내려 승리하거나, 미친 컨트롤로 악조건 속에서 역전을 거둬 보는 이로 하여금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과 컨트롤은 곧 실력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보다 더 확실하게 순위를 매길 수 있다. 반면, 입구 막기를 잘했다거나 저글링 1억 마리 막기를 성공했다고 해서 실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즈맵은 운의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방장 사기 맵’으로 불리는 극한의 언밸런스 맵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럼에도 유즈맵은 살아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즈맵이 게임 실력과 직결되지 않기에 살아남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동안 e-스포츠계의 빙하기를 초래했던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 사건’ 당시, 프로게이머는 하나둘씩 은퇴하거나 다른 게임으로 전향했고, 케이블 게임 방송국마저 줄줄이 폐국하여 한 시대를 주름잡던 블리자드 시대가 저물어 갈 때도 유즈맵 유저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자체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며 명맥을 이어온 유즈맵 몇 가지를 소개한다.
저글링 블러드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저글링 블러드”는 플레이어 영역에 매초 생성되는 저글링을 이용해 목표 킬 카운트를 달성하는 것이 승리 목표이며 물량을 적절하게 배분하여 상대 저글링 부대에 수적 우위를 먼저 취하는 것이 중요한 공략 포인트다. 최대 8명이서 플레이할 수 있는 개인전 유즈맵이지만 동맹을 쉽게 맺을 수 있는 스타크래프트 특성상 온갖 권모술수가 암약한다. 동맹 맺은 플레이어가 자신의 영역에 주둔해 있을 시 뒤통수를 맞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또한 킬 카운트 별로 주어지는 영웅 유닛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주변 유닛에게 까지 피해를 줄 수 있는 스플래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영웅이 나온다면, 이 영웅이 죽지 않도록 컨트롤하는 게 관건. 뮤탈리스크, 마린, 히드라 리스크 등 다양한 블러드 류 바리에이션 유즈맵이 존재한다. 피 튀기는 난전이란 의미로 ‘블러드’라 명명했다고 하나 기원은 정확지 않다. 다만, 하나의 유닛이 무한정 생성되는 것의 대명사로 ‘블러드’가 사용되어 유즈맵 안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는데, 섬멸전 모드로 진행되는 스타크래프트 프로 리그에서도 하나의 유닛을 모아 대규모 교전을 벌이는 것 역시 ‘블러드’라 부르곤 했다.
신전부수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신전부수기’는 첫 번째 버전이 만들어진 이후로, 여러 제작자가 다양하게 변형, 배포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여러 가지 버전이 난립하였으나 가장 몰입도가 높은 ‘바람의 행진곡’과 ‘올댄뉴(Old and New)’ 두 버전으로 유저가 몰리며 ‘신전부수기’ 천하이분지계를 이루게 되었다.
각 플레이어별로 종족 혹은 프로게이머를 선택해 상대의 전진 신전과 메인 신전을 파괴하면 승리하는 방식은 동일하지만, ‘바람의 행진곡’이 섬멸전 모드에 가까운 컨트롤을 중요시하는 방식이라면, ‘올댄뉴’는 물량과 업그레이드를 중요하다는 것이 특징. 무엇보다 올드 프로게이머 & 뉴 프로게이머를 뜻하는 ‘올댄뉴’ 명칭처럼 종족 선택 시 ‘천재테란 이윤열’, ‘폭풍저그 홍진호’, ‘영웅토스 박정석’ 등 프로게이머의 주 종족을 타이틀로 선택하는 것이 재밌다. 프로게이머 별로 주어지는 기본 유닛이 다르니 빌드를 생각해 상대방의 카운터를 잡는 것 또한 중요하다.
“스타크래프트 2″가 출시된 이후로 유즈맵 자유도가 높아짐에 따라 과거 사랑받던 유즈맵 다수가 이식되었는데, 신전부수기 시리즈 역시 오리지널, 넥스트 제네레이션, 프로게이머 대전 등의 하위 타이틀로 배포되었다. 하지만 게임 자체의 인기도가 낮아짐에 따라 맵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는 등 자잘한 버그가 발생한 채로 방치되고 있다.
카오스
2002년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이온 오브 스트라이프(Aeon Of Strife)” 첫 번째 버전이 배포된 이후로 유저는 하나의 장르로서 AOS의 맛을 제대로 알아버렸다. “도타(DOTA)”와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 조상급 유즈맵 “이온 오브 스트라이프”는 사령관이 되어 자신의 모든 유닛을 컨트롤하는 다른 섬멸전, 유즈맵과 다르게 단 하나의 영웅 유닛만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주된 특징이며 양측 진영에서 세 갈래로 퍼져있는 길을 방어 혹은 공격하여 숙주 건물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웅의 종류, 맵의 형태 등 다양한 변형이 있지만 앞서 설명한 주된 특징을 가져가는 것이 AOS 장르 게임의 묘미다.
‘이온 오브 스트라이프’ 이후 “워크래프트 3” 유즈맵 ‘도타’, ‘카오스’, ‘도타 올스타즈’가 차례로 배포되며 어느 정도 정제된 형태를 갖춘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타크래프트”에는 없지만 “워크래프트 3″에는 있는 영웅 육성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도 알맞고, 모델링이 가능한 “워크래프트 3” 특성상 시각적 재미를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카오스’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유즈맵 세계가 언제나 그렇듯이 ‘도타’ 무단 수정맵으로 시작하여 한국어 패치, 빠르고 공격적인 템포의 게임 진행 방식을 도입하였고 성격 급한 한국인 유저를 만족시켜 주었다.
개발 초기엔 ‘도타 카오스’란 이름을 걸고 배포하였으나 맵 형태를 바꾸어 앞에 붙은 도타를 버리고 ‘카오스’로 정착하였고, 리그전까지 진행하며 높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워크래프트 3″에 이식된 유즈맵이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2009년 출시한 “리그 오브 레전드”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카오스 프로게이머는 “리그 오브 레전드”, “도타 2″로 주 종목을 바꾸기에 이른다. 실제로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프로팀 T1에서 활동했던 푸만두(PoohMandu), kt롤스터에서 활동했던 마파(Mafa), 류(Ryu) 역시 카오스 클랜 배틀 우승자 출신이기도 하다.
이후 원작을 이식한 독자적인 온라인 게임 “카오스 온라인”이 출시되며 “워크래프트 3” 유저의 유입을 기대하였으나 원작과 같은 듯 다른 그래픽, 스킬 트리, 영웅 특성 등 높은 진입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8년 서비스를 종료한다. 2021년 재오픈하였으나 “워크래프트 3” 유즈맵 ‘카오스’와 마찬가지로 골수팬만 남아 크립을 잡으며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파이트 오브 캐릭터즈
그 시절, PC방에 가면 귀를 찌르는 효과음에 캐릭터가 내지르는 기술 시전 효과음을 기억하는 이가 있는가? ‘파이트 오브 캐릭터즈(이하 파오캐)’는 드래곤볼,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등 당대 최고의 만화 캐릭터를 선택해 맵 곳곳에 위치한 던전에서 생성되는 몹과 보스를 잡아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목표 킬 수를 달성하거나 파이널 보스를 잡아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주된 콘텐츠인 유즈맵이다. 앞서 소개한 ‘카오스’가 전략, 컨트롤형 유즈맵이라면 ‘파오캐’는 말 그대로 난전을 벌이는 데 묘미가 있다.
무엇보다 재밌는 건, 수정이 비교적 자유로운 유즈맵 특성상 보스, 캐릭터를 임의로 추가해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보스 마인 부우를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 커스텀해 MB를 때려잡는 버전이 있는가 하면, 그 시절 최정상급 걸그룹이었던 소녀시대 멤버 윤아를 캐릭터로 선택할 수 있는 버전도 있었다. 또한 스킬 시전 시간을 0으로 만들어버린 노 쿨타임 버전은 끊임없이 스킬 시전 키를 눌러야 해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후 “도타 2”, “스타크래프트 2” 유즈맵 제작자들이 “워크래프트 3” 버전 ‘파오캐’를 이식해 제작하기도 했다.
원피스 랜덤 디펜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으로 시작해 “워크래프트 3″로 이식되어 현재까지도 꾸준히 업데이트되는 ‘원피스 랜덤 디펜스’는 라운드마다 나오는 몬스터를 잡아 개체수를 줄여 자신의 라인을 방어하는 전형적인 디펜스 유즈맵이다. 라운드 별로 주어지는 랜덤 위습 두 기를 통해 무작위로 얻을 수 있는 원피스 캐릭터를 조합하여 상위 유닛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물리 데미지, 마법 데미지, 이동속도감소, 스턴 등 상위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고유 속성을 조합하는 것이 공략 포인트.
그래도 역시나 ‘랜덤’을 달고 나온 유즈맵은 이름값을 한다. 유닛 조합의 가장 기초가 되는 흔함 등급 유닛을 잘 활용하는 것에서 실력이 갈린다고 봐도 무방한데, 중후반부에 가선 정말 필요한 유닛만 안 나오거나 전혀 쓸모없는 유닛만 나오는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 그럴 땐 이벤트를 클리어하면 얻을 수 있는 선택 위습으로 원하는 유닛을 뽑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 다 사용하면 정말 답이 없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원하는 유닛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쉬움 모드 부터 가장 어려운 ‘악몽’까지 총 6단계로 구분된 난이도를 단계별로 클리어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라운드마다 나오는 몬스터가 쌓여 카운트가 한계에 도달하면 패배하게 되는데, 난이도가 높을수록 한계 카운트 또한 낮아진다. 더불어 스토리 존에 있는 건물을 난이도 별로 정해진 라운드까지 무조건 파괴해야 하니 신경 쓸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제작권 분쟁과 공식카페 매각 등 우여곡절이 많은 유즈맵이었으나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중독성을 가진 만큼 골수 유저의 응집력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2023년, 공식 카페는 원피스 지식재산권을 보유한 기업으로부터 유통 중단 및 손해배상 청구 통보를 받았다고 밝히며 더 이상의 업데이트와 배포는 없을 것이라 밝혔다. 현재 온라인에서 배포되고 있는 버전은 비공식 버전. 물론, 캐릭터 저작권을 무시하고 만든 유즈맵에 공식, 비공식을 나누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필자는 저번 주에도 PC방에서 ‘원피스 랜덤 디펜스’를 즐겼다. 사실, 맥 OS에서 “워크래프트 3″가 구동되지 않는 기술적 문제를 3주째 고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블리자드의 게으름 탓이다. 그럼에도 플레이스테이션 라이브러리에 쌓여있는 게임보다 굳이 PC방에 가서 원피스 랜덤 디펜스를 하고 싶었다. 가끔 그럴 때 있지 않나? 마치 과거에 듣던 음악에 갑자기 꽂혀 일주일 내내 반복해서 들을 때. 악몽 난이도를 클리어하고 깔끔하게 삭제하겠다는 다짐한 이상, 원피스 랜덤 디펜스를 켤 수밖에 없다. 오늘도 유즈맵 시대를 찬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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