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말괄량이 삐삐밴드의 유쾌한 펑크 모먼트 모음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는 여러모로 나쁘다. 마약, 미성년자 성행위, 폭주족, 본드 등 당시 ‘사회악’으로 정의되던 행위를 실제 비행청소년들을 배우로 기용해 그려낸 점이 그렇고, 기존 영화의 모든 문법을 무시하며 전통적 미디어 매체가 내보이던 나쁨의 진짜 면면을 밝혀낸 점이 그렇다. 물론 이 또한 다분히 장선우스러운 나쁨이다. 하지만 한 가지를 굳이 더 꼽자면 “정해진 배우없음, 정해진 카메라없음, 정해진 편집없음, 정해진 거 다없음”이라는 도입부와 함께 흘러나오는 귀를 찌를듯한 사운드의 BGM도 빼놓을 수 없다. 멜로디는 휘발되고 보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지배하는, 건강에 퍽 이로울지 않을 것 같은 삐삐밴드의 노래, “나쁜 영화” 말이다.

90년대 중후반, 한국 인디 펑크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이라면 빨간 머리의 보컬을 필두로 한 삼인조 그룹, ‘삐삐밴드’의 이름이 꽤나 반가울 것 같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그들이 내보이던 파격적인 음악과 패션 스타일은 한 번 보면 좀처럼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가히 충격적이니 말이다. 삐삐밴드와 관련된 자료라면 ‘시대를 앞서간 밴드’라는 말이 절대 빠지지 않듯, 거진 30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신선하기만 하다.

삐삐밴드는 빨간 머리 보컬 이윤정과 현재 ‘달파란’이란 이름으로 한국 영화음악계를 주름잡는 강기영 그리고 H2O 출신의 기타리스트 박현준이 1995년 결성한 밴드로, 약 2년 반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 안에 한국 펑크 음악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그도 그럴 것이 ‘밴드’의 개념을 넘어 하나의 ‘문화 기획’이었던 팀이 바로 삐삐밴드이기 때문. 그렇기에 삐삐밴드의 무대는 하나같이 주옥같다. 펑크와 전자음악의 결합부터, 생방송이 만연하던 당시 방송 시스템에서 핸드싱크와 AR 틀기까지. 지금 다시 돌아온다 해도 여전히 엉뚱할, 그리고 사랑스러울 삐삐 밴드의 무대를 함께하며 그 반항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을 영상과 음악으로나마 만끽해 보자.


1. 안녕하세요

‘빨간 머리 이윤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무대가 바로 이 무대가 아닐까 싶다. 1집 타이틀곡 “안녕하세요”로 1995년 9월 29일 ‘MBC 인기가요’ 무대에 오른 삐삐밴드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보컬, 쟈니 로튼(Johnny Rotten)이 떠오르는 붉은 머리와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롱 레더 코트와 트랙탑으로 펑크의 느낌을 한껏 살린 세 사람.

식사하셨어요? 별 일 없으시죠? 
괜찮으세요? 수고가 많아요.
우리 강아지는 멍멍멍
옆집 강아지도 멍멍멍

안녕하세요? 오오 잘 가세요. 오오
좋은 꿈 꾸셔요. 좋은 아침이죠. 
내일 또 봅시다. 동방예의지국
지금 사람들은 1995년. 
옛날 사람들은 1945년

안녕하세요? 오오 잘 가세요. 오오

당시 MBC 측의 설명 역시 ‘세련된 형식적 음악 거부, 가식보다는 개성을 존중’인 것처럼 삐삐밴드는 패션 스타일은 물론 파격적 사운드로 더욱 시대를 앞서갔다. 가벼운 멜로디 위로 흐르는 알 수 없는 가사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체면을 중시하고 형식에 얽매이던 당시 사회를 재치 있게 꼬집는 걸 알 수 있다.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삿말이 사실은 ‘개’소리에 비슷한 인사치례라는 것 그리고 1995년에 살고는 있지만 사고는 여전히 50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것 등등. 물론 보컬의 기술적인 면은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이 또한 의도된 미숙함이지만.

당시 PC 통신으로 실시간 의견을 전하던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한데, “이 노래는 별루”부터 “머리에 폭탄 맞았나?”, “저런 노래로 가수 할려고?” 등등의 매몰찬 반응이 쏟아졌다고. 하지만 실시간 반응과는 다르게 삐삐밴드의 1집 [문화혁명]은 1998년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 61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7년에는 51위로, 2018년에는 무려 33위까지 순위가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며 세월과 함께 그 진가를 증명해 갔다.

2. 딸기

삐삐밴드의 1집을 명반으로 만든 곡 중에는 “안녕하세요” 외에도 바로 이 노래, “딸기”의 공이 상당했다. 당시 펑크 밴드라 하면, 네모 반듯한 사회에 당당히 도전장을 던지는 반항적 메시지를 음악에 담아야 한다는 나름의 사명감이 존재했다. 하지만 삐삐밴드는 역시 그런 건 개나 주라는 듯이 무작정 ‘딸기’를 외치기 시작했다.

설탕에 찍어서 딸기를 먹었어 
딸기밭에서 하루종일을 놀았어 
한참을 놀다보니 하루가 다갔어
하루는 왜 24시간 일까

딸기 내 친구는 사랑스러워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딸기가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좋다구 딸기 좋다구

아니, 외치는 걸 넘어 거의 괴성에 가까운 보컬과 전자음악으로 딸기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 반복되는 멜로디 속 의식의 흐름으로 넘실대는 보컬, 이 자체로 기존 밴드 음악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가뜩이나 딸기 철에 이 노래를 들으니 오늘도 시장에 들러 딸기 한 소쿠리 사지 않을 수 없겠다.

3. 요즘 애들 10계명

1. 담배 정도는 태워야지 멋지고
2. 메이커 옷은 각각 두어 벌
3. 압구정동 어느 카페를 말하면 두 번 묻지 않고 찾아오고
4. 요즘 애들 네 명이 한곳에 모이면 자동차 키가 두 개 이상
5. 나이트는 안 가면 춤이 바뀌니까, 한 달에 두어 번은 가야지
6. 순수한 사랑은 결혼한 후에 하고
7. 유행에 민감해져야만 해
8. 놀러 갈 때 콘도 예약은 필수이고 율동 없는 노래 부르지 마
9. 연예인 서너 명 정도는 알고 있고 색깔 없는 빤쓰 입지도 마
10. 주머니엔 비록 동전 몇 개 있어도 겉모습은 부티가 나야 돼

사실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11계명, 12계명도 되겠지만 뭐 개수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중요한 건 그들이 1995년 관찰했던 ‘요즘 애들’의 모습이 2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는 점 아니겠나.

이렇듯 1집 [문화혁명]은 통한 기성세대를 향한 재치 있는 일침의 “안녕하세요”와 겉만 번지르르한 젋은이들의 행태를 꼬집은 “요즘 애들 10계명”이 공존하는 전방위적 반항의 표식이라 할 수 있다. 듣고 있자니 10계명 중 본인은 몇 개나 행하고 있는지 괜스레 셈하게 되는 곡 “요즘 애들 10계명”.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4. 나쁜 영화

앞서 언급했듯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와 삐삐밴드는 상당 부분 닮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선우 감독이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 모티브가 된 것이 바로 삐삐밴드의 2집 수록곡 “나쁜 영화”기 때문. 후에 전해진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 장선우 감독이 강기영에게 “나쁜 영화”를 배경 삼아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고.

삐삐 밴드의 “나쁜 영화”가 흘러나오는 도입부 부분에는 다소 촌스럽고 우악스러운 문구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정해진 배우없음”, “정해진 카메라없음”, “정해진 미술없음”, “정해진 음악없음”, “정해진 편집없음”, “정해진거 다없음”, “다만 최대한 쉽게 생각하기로함 그들이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맞춤법도 틀린 걸 보니 정말 정해진 게 하나도 없는 듯한 영화임이 짐작이 간다. 하지만 바로 그 무질서, 무절제야 말로 “나쁜 영화”의 정신 아니겠나. “최대한 쉽게”,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만큼 이 영화, 그리고 삐삐밴드를 잘 나타내는 말도 없겠다. 그러니까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역시 펑크라는 이야기다.

5. 유쾌한씨의 껌 씹는 방법

2집 [불가능한 작전]의 타이틀곡, “유쾌한씨의 껌 씹는 방법” 역시 삐삐밴드를 대표하는 곡 중 하나로 ‘유쾌한씨’가 껌을 씹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곡 내용의 전부. 맥락 없이 “유쾌한씨는 유쾌하기도 하지, 여자를 보는 유쾌한씨를 보라”의 말을 남발하는 걸 보면 의식의 흐름대로 곡을 진행하는 “딸기”와 궤를 같이 하는 곡이란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이라면 “충혈된 눈 더듬거리는 말 솜씨 높다란 콧등, 보는 시선도 여러 가지 다리 보기, 가슴 보기 히프 보기 부풀려 보기도” 같은 가사로 여자를 관찰하는 ‘유쾌한씨’의 음흉한 시선을 가사로 재치 있게 녹여냈다는 것인데, 이 ‘유쾌한씨’에 해당하는 인물이 실은 황신혜밴드의 ‘조윤석’이라는 사실.

첨부한 영상은 1996년 7월 20일 방송된 MBC 인기가요 무대로, 영화 같은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 ‘씨네뮤직’에 등장한 삐삐밴드의 모습이 담겼다. 영상 인트로에는 세기말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와 삐삐밴드를 오버랩한 모습도 엿볼 수 있다.

2집으로 복귀하며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보컬 이윤정의 트레이드 마크 ‘빨간 머리’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대신 캐릭터 삐삐를 연상케하는 뽀글 머리로 미래적인 느낌을 살린 걸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카레나와 유사한 복고풍 안무까지 재기 발랄한 멜로디와 어우러지며 그 매력을 더하고 있으니, 공중파 무대에서 남의 껌 씹는 방법을 주구장창 설파하는 그 유쾌한 모습을 함께 감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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