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쯤, 홍콩에서 온 손님이 있었다. 아시아의 언더그라운드 밴드 신(Scene)을 다루는 웹진(Webzine) 유나이트 아시아(Unite Asia)의 운영자이며 지금은 해체된 밴드 킹 라이 치(King Ly Chee)의 보컬, 현재 밴드 대거(Dagger)의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인 리즈(Riz)는 업무와 여행을 겸해 한국을 방문했고 SNS에서 교류한 이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리즈는 파키스탄계 인물로 미국에서 거주한 적이 있고 식 오브 잇 올(Sick of It All)의 게스트 밴드로 같이 전미 투어를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이나 아시아의 펑크/하드코어 신에 관한 이야기가 마르지 않을 정도로 아시아 신에 자부심이 강했다.
대화의 주를 이룬 또 하나의 내용은 바로 ‘미래의 홍콩’이었는데, 본인이 홍콩으로 돌아가면 머지않아 중국 정부의 탄압이 자행될 거라 우려했고 실제로 그가 서울을 떠난 뒤 그 예상이 현실화되고 말았다. 홍콩 자치정부가 ‘범죄인 송환법’을 추진하게 되면서 이에 반발한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로 이어졌고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현재 리즈는 유나이트 아시아를 통해 홍콩의 상황을 전달하고 독자로부터 홍콩 시민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홍콩 민주화 운동이 2019년 6월부터 대규모로 행해질 무렵, 거리 집회 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게 된 것은 큰 화제가 되며 국내 뉴스에 보도되었다. 또한 여러 매체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해외 현지인들이 불렀던 사례들을 보여주며 여러 나라의 집회에 해당 곡이 쓰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시민군 윤상원 열사와 들불야학의 설립을 주도한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진 민중가요다.
홍콩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지 벌써 수 개월이 흘렀다. 정치적 자유가 실질적으로 금지된 홍콩에 전 세계적인 이목이 쏠리는 지금, ‘민중가요’의 역사와 흐름을 돌이켜보는 일은 가슴 아픈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공유하는 아시아권 국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영감을 줄지도 모르는 일. 천천히 감상해 보자.
민중가요(Protest Song)
민중가요는 대체로 저항가요, 항쟁가요라는 용어로도 쓰이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널리 알려진 노래는 물론, 개인이나 단체가 사회운동에 쓰이기 위해 작곡한 곡도 이에 포함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은 가장 대중적인 민중가요 아티스트이며 작년에 활동 40주년을 기념한 전국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포크 듀오 정태춘, 박은옥 또한 민중가요 아티스트로 알려졌다.
1970년대 말부터 한국 민중가요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대학과 노동조합에서 결성된 민중가요 동아리인 노래패들이 발표되지 않은 노래를 작곡하고 집회 현장의 공연을 통해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대학마다 존재하는 민중가요 동아리는 각 지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민중가요가 대학생의 주도로 유행해 사회운동과 함께 발전하게 된 사례는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960년대에 일어났던 학생운동과 그 주도층이 발생하면서 일본의 민중가요 문화가 성행하게 된다. 민중가요가 학생운동과 함께한 점, 상당수의 곡이 한국과 일본,각자의 나라에서 불려진 점 등 일본의 민중가요는 한국의 대중음악 측면에서도 매우 흥미롭게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단카이(團塊) 세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주도했던 86세대가 있었다면 일본의 학생운동을 주역으로 단카이 세대를 꼽는다. 이들을 움직이게 한 동인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체로 같은 시기, 베트남 전쟁을 주된 이유로 보고 있다. 일본이 패전 후 미국과의 미일안전보장조약을 통해 자국의 일부 지역을 기지화하여 베트남 전쟁에 지원하게 될 상황이 되자 일본 정부, 혹은 일본 공산당과 같은 기존 진보 세력에 저항해 1959년에 벌어진 안보투쟁(安保闘争)을 시작으로 단카이 세대가 일본 사회에 등장한다.
이들은 1968년 일본 학생 투쟁사에서 가장 극렬했던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 일명 전공투 시기를 거치게 되고 1년만에 빠른 속도로 해산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극히 일부가 연합적군(連合赤軍)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 등을 통해 극단적인 진보 운동을 이어갔는데 당시 전공투에 참여한 사람들이 사용했던 공사장 헬멧과 쇠파이프 등의 복장이나 일본 적군파의 수장 및 시인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와 함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에서 활동했던 시게노부 후사코(重信 房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복복시계(腹腹時計) 등 여러 요소가 현재 일본의 미디어에 녹아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한국의 86세대보다 앞섰던 시기에 일어난 단카이 세대의 전공투는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났고 그 과정 중 많이 언급되는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은 매우 치열했다고 한다. 각 학교에서 전공투를 경험한 사람 중에는 사카모토 류이치(坂本 龍一), 무리카미 하루키(村上 春樹) 등과 같은 유명인이 다수 있고 일부는 전공투 이후 사회운동을 계속 이어나간 민중가수로, 또 다른 이들은 70년대와 80년대를 대표하는 대중가수로도 활동하게 된다.
가토 도키코(加藤 登紀子)
일본의 원로 가수인 가토 도키코는 한국에서는 작곡가 홍난파의 “봉선화”를 비롯해 본디 라트비아의 곡이자 가수 심수봉이 커버하며 알려진 “백만송이 장미”를 일본에서 부른 인물이다. 본래 60년대 중반에 데뷔하여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신인상과 가창상을 수상하였고 방송사 NHK에 출연할 정도로 인기를 누린 가수였지만 1972년 5월 방위청 습격 사건으로 체포 후 구류된 적도 있다. 이때 그녀는 후지모토 도시오(藤本 敏夫)라는 학생운동가와 옥중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는 가토 도키코라는 인물의 가장 유명한 일화로 기록되어 있다. 후지모토 도시오는 1968년에 그녀를 공연에 섭외했고 가토 도키코가 본인이 정치적인 이용을 당할 것 같다는 우려에서 거절했지만 이를 계기로 둘은 교제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그녀도 후지모토 도시오처럼 진보 운동에 뛰어들며 1966년부터 시작된 나리타 공항 건설 저지 투쟁(산리즈카 투쟁)의 청년 행동대원들이 기획한 산리즈카 환야제(三里塚・幻野祭)에 개런티 없이 공연하는 등 여러 행보를 이어왔다. 당시 산리즈카 환야제에는 미국의 소닉 유스(Sonic Youth)가 인정한 하이노 케이지(灰野 敬二)나 블루스 크리에이션(Blues Creation), 두뇌경찰(頭脳警察) 등의 아티스트들이 출연했다고 알려진다.
가토 도키코는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1992년 개봉된 스튜디오 지브리(Studio Ghibli)의 “붉은 돼지(Porco Rosso)”에서 마담 지나 역 목소리로 참여하며 영화에 수록된 주제곡 “체리가 익어갈 무렵”과 엔딩곡 “가끔은 옛날 이야기를”을 직접 부르기도 했다. 특히 엔딩곡 “가끔은 옛날 이야기를”에 대해서는 가토 도키코 본인의 진보 운동 시절을 회상하는 곡이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다수 있다. 참고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전공투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미온적이지만 당시 진보 사상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는 산리즈카 투쟁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임진강(イムジン河)
일본의 민중가요에는 한국의 음악에서 착안해 작곡하거나 기존의 노래를 그대로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는 경우가 다수 있는데 오카바야시 노부야스(岡林 信康)라는 아티스트를 좋은 예시로 들 수 있다. 그는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私たちの望むものは)”, “자유로의 긴 여행(自由への長い旅)” 등 동료 및 후배 가수들이 많이 커버 연주하는 곡을 쓰기도 해서 일본의 대표적인 포크 뮤지션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그도 영국의 킹 크림슨(King Crimson) 멤버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에게서 자신들을 모방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음악적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일본의 전통악기와 한국의 사물놀이 타악기를 접목한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이는데 한국 민요에서 가사와 멜로디를 빌려온 “뱃노래(ペンノレ)”와 같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카바야시의 “뱃놀이”보다 매우 앞선 시기에 일본으로 넘어와 불린 노래가 있었고 그것은 바로 “임진강”이다. 본래 1957년에 작곡된 북한 노래로 임진강 넘어 남한에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곡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총련)의 사람들이 부르던 “임진강”을 마츠야마 타케시(松山猛)가 일본어로 번안했다고 한다. 사실 총련은 북한의 지원을 받는 재일 조선인 단체였고 당시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를 맺지 않았던 상태라 “임진강”을 공연에서 연주했던 밴드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는 녹음된 임진강 곡의 발매 중지를 결정했고 노래를 역재생해 녹음한 “슬퍼서 어쩔 수 없어(悲しくてやりきれない)”라는 이름으로 발매한다. 해당 곡은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만화원작의 영화 “이 세상 한 구석에(この世界の片隅に)”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으로 쓰였다.
2000년대 넘어서는 “임진강”이 다시 주목받게 된 이유는 2004년에 개봉된 영화 “박치기!(パッチギ!)”에 주요한 소재로 쓰이면서다. 영화는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를 그려낸 내용으로 배우 시오야 슌(마쓰야마 고스케 역)이 통기타로 방송금지곡 “임진강”을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2018년에는 인디 싱어송라이터 이랑이 직접 연주한 “임진강”을 수화 뮤직비디오로 제작해서 공개했다.
엔도 미치로(遠藤 ミチロウ)
일본 후쿠시마 출신의 엔도 미치로는 1980년에 결성된 더 스탈린(The Stalin)의 보컬이자 초대 멤버이다. 더 스탈린이라는 밴드명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으로 따서 정하자는 엔도 미치로의 의도에 기인한다. 그는 공연장에서 비둘기와 돼지 사체를 던지거나 관객을 향해 자위행위를 하는 등의 기행을 한 것으로 유명해지면서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개의치 않고 활동을 이어나갔다. 더 스탈린의 두 번째 앨범인 [Stop Jap]은 일본은 물론 해외의 펑크 신(Scene)에서도 반드시 언급되는 명반이다.
엔도 미치로는 1983년 7월 10일 오카야마 대학 신문의 인터뷰에 참여한 적이 있고 이를 통해 더 스탈린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풀어낸다. 과거 혁마르파(革マル派)와 중핵파(中核派)의 갈등이나 산악 베이스 사건 등이 일어난 경위에 대해 엔도 미치로는 “대학 투쟁이 섹트주의로 변모했고 이것은 곧 정치투쟁으로서 실패했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러한 시기를 거친 기성세대가 듣는 음악은 안일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더 스탈린은 펑크 밴드이자 매우 정치적인 밴드로 만들고 싶었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정치적인 태도를 내비치는 밴드로 동시대 펑크 밴드인 기즘(G.I.S.M.)이 언급된다. 보컬 사케비가 만든 팬진(Fanzine)인 퍼포먼스 오브 워(Performance of War)에서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늑대 부대의 부대원과 인터뷰한 내용을 담기도 했고 따로 금전적 지원도 있었던 걸로 알려지는데 기즘과 더 스탈린은 각자의 정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그 감도가 살짝 다르다. 사케비의 팬진과 DVD에 담아낸 공연실황과 전쟁 영상 등 기즘의 콘텐츠에서 보이는 폭력적인 내용을 비추어봤을 때 다른 의미로 섬뜩한 느낌이 있다.
2010년대에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엔도 미치로의 고향 후쿠시마에 원전 사고가 발생하자 직접 통기타를 치며 솔로 가수인 동시에 반핵운동가로 활동했다. 특히 본인 스스로 제작을 맡아 원전 폭발 피해를 입은 고향 후쿠시마로부터 환갑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인 “펑크 뮤지션과 동일본 대지진(Mother, I’ve Pretty Much Forgotten Your Face)”은 2016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출품되어 특별상을 받았고 2017년 한국을 방문해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2019년 4월 25일 췌장암으로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딸기 백서’를 다시 한번(『いちご白書』をもう一度)
1970년에 개봉한 “분노의 함성(The Strawberry Statement)”은 1968년 4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이라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대학 당국이 흑인거주지의 놀이터를 철거해 학군단을 설치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여 일어난 학생운동을 담은 내용인데 당시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움직임을 다룬 작품이다. 한국에서 큰 인지도는 없지만, 일본에서는 “딸기 백서(いちご白書)”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어 적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런 인기 영화의 이름을 딴 노래인 “딸기 백서를 다시 한 번”은 1975년 포크 그룹 반반(Ban-Ban)이 발표해 오리콘 차트 1위를 하게 된 곡이다. 당시 반반 멤버인 반바 히로후미(ばんばひろふみ)는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에서 디스크 자키로 활동하며 인기가 높았지만 특정한 히트곡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동시대에 활동하던 작곡가이자 가수 아라이 유미(荒井 由実)에게 학생운동을 주제로 한 곡을 요청해 그녀가 작사와 작곡을 한 것이 “딸기 백서를 다시 한 번”이다. “12월의 비(12月の雨)”, “연인이 산타클로스(恋人がサンタクロース)” 등의 히트곡을 많이 내놓은 아라이 유미는 뛰어난 작곡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녀의 곡들은 각종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으로 쓰였고 동료 가수들에 의해 많이 커버되었다.
“딸기 백서를 다시 한 번”는 학생운동이 막을 내리고 다시 사회로, 취업의 길로 향하는 청춘들의 허무한 감정을 담은 노래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전공투가 진압되고 나서 대학생 사이에서는 학생운동을 향한 의지가 퇴색되어 갔다. 투쟁에 가담한 학생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회사의 톱니바퀴 같은 존재가 되었기에 단카이 세대들에게 “딸기 백서를 다시 한 번”이라는 곡은 좌절감과 시대의 기억을 머금은 노래가 되었다. 한국의 80년대 학생운동, 프랑스의 68혁명, 중국의 천안문 6.4 항쟁을 경험한 세대 또한 이와 같은 상황에 들어서며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미지 출처│The Eye Forg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