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Edward Hopper의 단독 전시, ‘Edward Hopper: On the Road’와 함께하면 좋은 작품 미리보기

양질의 대형 미술 전시를 기대해왔던 이들이라면 올 한 해가 퍽 반가울 듯싶다. 키키 스미스(Kiki Smith)부터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그리고 김환기까지, 거장들의 블록버스터급 전시 소식으로 아트 캘린더가 빼곡한 한 해이기 때문. 하지만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빅이벤트가 바로 4월 20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예정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단독 전시회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Edward Hopper: On the Road)’라는 제목으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호퍼의 회화, 드로잉, 판화, 아카이브 등 총 270여 점의 작품을 최초 단독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도심 속 현대인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대거 남겼다. 그 단면에 표현되는 미국인들의 마네킹처럼 쓸쓸한 익명성과 보편적인 고독감이 대개 그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다. 혹자들은 미국을 배경으로, 또 미국인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한 호퍼의 그림을 가리켜 ‘가장 미국적인 그림’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미국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거의 사라진 오늘날에 이런 문화적 구분은 더 이상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을뿐더러, 그의 그림이 자극하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헛헛한 감정은 국가나 인종을 막론하고 현대적 삶을 공유하는 이들 대부분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이 된 듯하다.

동시대를 향한 보편적 공감의 경지를 성취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다양한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오늘은 그중 몇몇을 들어 소개해 보려 한다. 혹시 아는가? 기억해두면 다가올 에드워드 호퍼전의 감상이 더 다채로워질지. 하다못해 같이 간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심심풀이 가십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음은 히치콕의 영화와 호퍼의 작품을 대조해 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히치콕이 미국으로 이주한 1939년경, 그는 미국을 창작의 배경으로 삼으며 미국인들의 일상에 불현듯 침입하는 공포를 담아내고 싶어 했다. 이때 에드워드 호퍼가 그리는 미국인들의 황량한 고독의 단면들은 그 무대가 되기 안성맞춤이었다. 또, 호퍼가 주로 사용하는 빛과 그림자의 강한 콘트라스트,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서사, 외따로 떨어진 저택이나 텅 빈 방에서 느껴지는 고독감 등은 히치콕이 만들고 싶어 했던 영화 속 다양한 모티프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히치콕이 본격적으로 영화에 몸 담기 전, 미술을 공부했다는 사실 또한 두 인물이 괜스레 포개어 보이는 이유다.

이런 점들로 미뤄볼 때 히치콕의 미장센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구도와 배치, 도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가령 따분한 삶을 살고 있는 찰리의 집에 연쇄살인마 삼촌이 들이닥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의 배경 저택은 에드워드 호퍼의 ‘Hodgkin’s House’ 이미지를 닮아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리는 쓸쓸한 저택의 이미지는 이 밖에도 ‘The City’, ‘House by the Railroad’, ‘Captain Upton’s House’ , ‘Room for Tourists’ 등의 그림에서도 살펴지는데, 이는 히치콕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싸이코” 속 저택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싸이코 속 노먼 베이츠의 저택은 호퍼가 그린 ‘The House by the Railroad’ 저택 이미지(슬라이드 상 4번째)와 특히 닮아있다. 고풍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헛헛한 저택의 이미지는 둘의 작품 세계에서 반복되는 주제 모티프다. 현대적 풍경과 영화적 화면 구성 뒤로 기묘한 고독감이 조용히 번진다. 이 누기진 풍경으로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틈입시킨다.

히치콕의 “Rear Window”에서도 둘 사이의 유사성이 발견되는데, 영화 속 사진가 제프가 관음증적으로 엿보는 이웃집의 모습은 ‘Apartment Houses’, ‘Night Windows’, ‘Room in Newyork’ 등에서 살펴지는 호퍼의 창문에 대한 묘사와 닮아있다. 둘은 모두 창 너머로 엿보이는 개인 간 단절의 틈새를 주목하고 응시했다.

이뿐일까, 히치콕의 흑백 스릴러 “The 39steps”의 몇 장면은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에칭 ‘Nights Shadows’와 ‘Comportment Car, C 293’을 스토리보드로 그대로 옮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강한 대비로 두드러지는 깊은 그림자와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의 유비가 흥미롭다.

이쯤 되면 둘 사이의 영향 관계를 부정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처럼 동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인 두 인물이 서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영향을 주고받았음은 흥미롭다. 이는 아무래도 두 인물 모두 본격적인 현대로 진입해가는 미국 사회에서 비슷한 창작적 배경을 공유했고, 빛의 사용, 관음증적 시선 등 유사한 미술적 착안점을 가졌으며, 고독과 우울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적 정서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2.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Blade Runner”와 그 후속작

SF의 전설이 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가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 ‘Nighthawks’에 영향을 받았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리들리 스콧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밤을 새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는 끊임없이 이 그림을 재생산하려고 했다. 우리 제작팀은 이 그림을 참고해 일러스트를 그리고, 분위기를 비슷하게 가져가려 했다”라고 밝혔기 때문.

블레이드 러너가 작품 속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고독한 정조를 고스란히 옮기려고 한 탓에 영화 속 콘트라스트 강한 누아르풍 미래도시는 고독이 심화된 우울한 세기말적 미래상을 담아내고 있다. 이 때문에 주인공 릭 데커드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이방인 또는 외톨이로서의 고립감이 고스란히 살아있고, 영화의 콘셉트 디자이너인 시드 미드(Syd Mead)가 남긴 콘셉트 아트는 마치 에드워드 호퍼가 그려 놓은 근미래의 도시 풍경 같다.

이러한 점은 후속작인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의 “Blade Runner 2049″에서도 이어진다. 전작의 콘셉트 디자이너인 시드 미드가 해당 영화의 제작에도 참여했기 때문인지, 릭 데커드와 K가 만나는 카페는 마치 ‘밤을 새는 사람들’ 속 어두운 다이너(Diner) 같고, 릭 데커드가 몸을 숨기는 호텔과 카지노에선 호퍼의 그림 속에서 보일 법한 깊은 그림자들이 우아하게 움직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비디오 게임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97)’ 의 인게임 화면

1997년에 발매된 동명의 비디오 게임 ‘Blade Runner’는 보다 직접적으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오마주한다. 웨스트우드 스튜디오(Westwood Studio)가 개발한 해당 게임은 포인트 앤 클릭 장르의 어드벤처였는데, 당시로선 첨단의 그래픽으로 영화의 장면들을 나름 충실하게 재현했다. CD 4장이라는 대용량 구성을 통해 배경을 공들여 구현한 것. 프리렌더링 CG 무비를 대량으로 사용해 산성비가 내리는 영화 속 디스토피아적 기후 상태를 음울하게 묘사한 점이 백미다. 해당 게임엔 데커드가 방문한 야시장의 국수집이 ‘밤을 새는 사람들’과 거의 동일한 구도와 분위기로 묘사되는데, 이때 에드워드 호퍼 그림 특유의 쓸쓸한 정조가 디스토피아 SF의 감성과 어우러진다. 오늘날 고해상에 익숙해진 눈으로 바라보면 조악한 비주얼이지만 어째서 일까, 이 빈곤한 이미지 특유의 저해상 로파이가 오히려 해당 화면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들고, 더 길게 머무르고 싶게 만드는 듯.

비디오 게임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97)’ 의 트레일러

현시대 SF 아이콘의 훌륭한 전범을 제시한 블레이드 러너가 그것의 비주얼을 다소간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 빚지고 있음은 흥미롭다. 알다시피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한다. SF 영화의 고전이 이전에 존재하던 작품들의 다양한 결합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과연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경구를 증거하는 듯하다. 또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최근까지 다른 변주로 계승된다는 점에서 다양한 창작물들 사이의 문화적 영향 관계 역시 가늠해 볼 수 있겠다.


로런스 블록(Lawrence Block) 외 16인, ‘빛 혹은 그림자(문학동네, 2017)’

3. 로런스 블록(Lawrence Block) 외 16인의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

지금까지 에드워드 호퍼가 영화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주로 살폈다면 이번엔 문학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일상 속 한 단면을 떼어낸, 말하자면 영화 속 스틸컷이나 소설 속 삽화 같은 한 장면을 제시하며 그 안의 서사를 유추하고 싶게끔 하는 매력을 지녔다. 그건 아마 호퍼부터가 어떤 순간을 화폭 위에 옮길 때 그 장면의 내러티브를 함께 포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대표작 ‘밤을 새는 사람들’부터가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단편소설 ‘살인자들(The Killers, 1927)’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호퍼의 붓끝에서 탄생한 다이너의 건조하고 쓸쓸한 풍경은 헤밍웨이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로부터 기원할 수 있었다.

그림 안에 이야기가 깃들어있다는 것. 로런스 블록의 ‘빛 혹은 그림자’는 호퍼의 바로 그런 특징을 겨냥한 소설집이다. 총 17인의 미국 작가들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창작해 앤솔러지로 묶었다. 주제나 장르를 제한하지 않은 덕에 스릴러, 드라마, 범죄, 미스터리, 환상문학 등 그 어떤 선집보다 이채로운 색깔이 모일 수 있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는 호퍼의 1926년 작 ‘Eleven A.M’를 택해 누드인 채로 창가에 앉아 오전 열한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여자와 여자가 기다리는 남자의 이야기, ‘창가의 여자’를 써 내려간다. 마이클 코넬리(Michael Connelly)는 한 사설탐정이 고객의 의뢰를 받고 시카고 미술관의 ‘밤을 새는 사람들’ 앞에서 그 그림을 감상하는 여자를 감시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밤을 새는 사람들’을 완성했다.

기획 자체도 흥미로운데 작가 17인의 라인업도 호화스러운 수준이다. 앞서 말한 조이스 캐롤 오츠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대형 작가며, 마이클 코넬리는 영미권 최고의 범죄 스릴러 작가로 손꼽힌다. 여기에 현시대 가장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Steven King), 퓰리처상 수상 작가 로버트 올렌 버틀러(Robert Olen Butler), ‘잭 리처’ 시리즈의 리 차일드(Lee Child), ‘본 컬렉터’ 시리즈의 제프리 디버(Jeffery Deaver) 등이 뒤따른다. 이 책을 기획하고 엮은 로런스 블록 역시 미국 추리작가클럽에서 수여하는 에드거 상을 여러 차례나 수상한 실력 있는 작가인데, 이 책을 통해 그 상을 또 한 번 수상했으니, 작품들의 퀄리티 자체는 의심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


지금까지 살펴본 바 외에도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과 영향 관계를 맺는 콘텐츠들은 무궁무진하다. 가령 에드워드 호퍼와 함께 동시대 영화계를 풍미한 필름 누아르 계보의 영화들은 서로의 그림 구도와 카메라뷰 시점을 참조하며 서로의 구성과 미장센을 심화했다. 최근에 있어선 구스타프 도이치(Gustav Deutsch) 감독의 “Shirley–Visions of Reality”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3점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연결했다. 또 로이 안데르손(Roy Andersson)감독의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작 “About Endlessness”에서 딥포커스가 적용된 회화에 가까운 숏들은 에드워드 호퍼의 터치가 스며든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이뿐일까, 필자의 시선이 미처 닿지 못했을 뿐 문학과 음악, 게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사례는 훨씬 풍부할 것이다.

이처럼 에드워드 호퍼는 다양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여러 작가들과 뿌리줄기처럼 접맥하여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과정 중 특기할 만한 점은 에드워드 호퍼라는 특출난 작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우뚝 솟아나 이곳저곳 일방향적인 입김을 불어 넣었던 게 결코 아니란 점이다. 상기했듯 그의 그림 역시 히치콕의 영화나 헤밍웨이의 소설, 또 기타 참조물로부터 영감을 주고받으며 탄생할 수 있었다. 이는 특정 문화적 생산물이 어떤 특별한 이의 천재적 영감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과 서로 상호 참조하며 역동적인 창작 과정을 거친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처럼 창작이란 결코 독자적이지 않고 여럿이 떠드는 것처럼 소란하고 수다스러운 것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SEMA, Arthur, Wikipedia, IMDb, The Verge, Alfred Hitchcock Geek,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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