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아리랑(1926)” 필름의 행방

일제강점기 1926년 10월 1일,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관 단성사에서 영화 “아리랑”이 개봉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김영진은 3·1운동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자가 된다. 그가 걱정되어 찾아온 친구 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한편 영진에겐 여동생 영희가 있었는데, 친구를 걱정하는 현구와 오빠를 보살피는 영희 둘 사이의 사랑이 싹튼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앞잡이 기호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현구가 이를 말리면서 둘 사이의 싸움을 멀뚱히 지켜보던 영진은 환상을 보게 된다. 사막 한가운데서 죽어가는 연인에게 한 상인이 다가가 남성에게 물 한 모금을 줄 테니 여성을 내놓으라는 제안을 말이다. 그러자 갑자기 흥분한 영진이 낫을 꺼내 환상 속 상인을 내리찍는데, 어느새 환상은 사라지고 휘두른 낫에 기호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로 인해 영진은 잃었던 정신을 되찾고 일본 경찰에 끌려가면서 “나는 이 삼천리에 태어나 미쳤다”라고 외친다.

영화가 개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성사는 이 비극적 이야기를 보기 위해 찾아온 조선인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출입문은 수많은 인파를 견디지 못해 아예 부서졌고 관객들은 주제가 ‘아리랑’을 목이 닳도록 따라 불렀으며 극장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관객 때문에 상영이 중지되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극장 밖에서 주제가를 부르는 사람이 끊이지 않자 이를 걱정한 일본 경찰이 기마 순사를 동원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킨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아리랑”은 당시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켰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 감독, 각본, 주연 춘사(春史) 나운규. 촬영 기간 4개월. 제작비 1,200원. 엑스트라 800여 명.

영화 “아리랑”은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자극해 냄과 동시에 단순한 신파극, 통속극, 모방물에 머물러있던 조선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춘사 나운규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나운규는 D.W 그리피스(D.W Griffith)의 “폭풍 속의 고아들(1920)”과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의 “로빈후드(1922)” 등 당시 서양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할리우드 활극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전 세계 영화 기법을 연구하면서 독일 리얼리즘 양식과 러시아 몽타주 이론을 사용하는 등 당시 조선영화로서는 획기적인 시도를 선보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의 민족적 정서를 영리하게 녹여내 관객을 영화에 몰입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당시 평론가들의 생생한 증언은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사로잡은 “아리랑”의 전설적인 일화를 대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첫째 역할이 적재적소를 얻은 것이 성공의 큰 원인을 지었으니 감독자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라운규, 신홍련(신일선), 주인규, 남궁운, 리규설 등은 다 각기 독특한 별다른 동작과 개성이 표현되었다. 장면은 거의 다 선명하였으며 특히 사막의 장면은 전 조선 영화를 통하여 가장 우수한 장면이라 하겠다. (하략)”

– 김을한(金乙漢, 영화동호회), 동아일보, 1926년 10월 7일-

“영화가 완성되었다. 단성사가 터질 듯했다. 날이 갈수록 만원이었다. 바로 우리나라 흑백 무성영화 시대의 획기적인 이 작품은 서울 장안을 설레게 했다. “아리랑”이야말로 최초의 구극조(舊劇調, 전통적인 연극)를 탈피한 첫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또 한 가지 장점은 관객의 심정을 만족할 만큼 포착한 점이었다. 마치 어느 의열단(義烈團)원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

– 이경손, 무성영화 시대의 자전, 신동아 1964년 12월호, 326쪽.

그러나 “아리랑”은 무수한 증언과 그 증거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재검증되곤 한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전쟁을 거치면서 필름을 유실해 영화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직접 보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텐데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부풀려진 명성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급기야 어떤 이들은 ‘필름은 이미 발견됐지만, 일화에 비해 영화가 너무 초라해 일부러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하곤 한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 희대의 명작으로 손꼽히지만, 정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남아있지 않은) “아리랑”의 원본 필름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물론 앞에서 이미 말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 필름의 행방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흥미롭다. 실제로 몇십 년 전 일본의 한 수집가가 필름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북한과 한국 정부가 “아리랑” 필름을 얻어내기 위해 열띤 경쟁을 펼친 적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자세한 내용은 차차 설명하겠다).

“아리랑” 필름의 행방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이번 글은 그 내용이 무척 방대하다. 그러나 모든 요소요소가 충분히 흥미진진할 것. 필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 일본인, 필름을 찾기 위한 한국과 북한의 경쟁, 존재의 의문점과 미스터리, 그리고 어쩌면 한국이나 미국에 있을지도 모르는 필름의 가능성 등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아리랑” 필름의 행방. 그 길고도 긴 여정을 한번 추적해 보았으니 그 발자취를 함께해 보자.


한국필림보관소(현 한국영상자료원)의 탄생과 초창기 한국영화 발굴사업

1974년 한국영상자료원의 전신인 한국필림보관소가 문을 연다.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 영화 필름 보존과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한 국내 언론 및 영화 연구가들의 호소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물론 반공주의가 국가이념으로 자리하던 1970년대 독재정권 시기답게 영화 분야에서도 북한보다 앞서야 했기 때문에 필름 보관소 설립을 서두른 감이 있지만, 어쨌거나 북한의 자극은 흐지부지되던 한국 최초의 필름 아카이브를 설립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해 결국 영화인들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진다.

이후 한국필림보관소는 1976년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 옵서버 가입을 시작으로 1985년 FIAF 정회원 가입, 1991년 한국영상자료원으로의 명칭 변경 등 체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법적 제도 및 권리를 확보했고 추후 한국 영화를 수집·보존하는 국가적인 공식 기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1994년부터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주요 과제인 ‘영상자료 보존사업’을 수행했고 2004년엔 ‘일제강점기 조선영화 발굴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고 성과도 있었지만 대부분 친일 영화로 분류돼 뒤늦게 공개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 발굴사업을 통해 한국영상자료원 조사단은 중국전영자료관에서 2004년 “군용열차(서광제, 1938)”, “어화(안철영, 1939)”, “지원병(안석영, 1941)”, “집 없는 천사(최인규, 1941)” 이상 4편을, 2005년 “미몽(양주남, 1936)”, “반도의 봄(이병일, 1941)”, “조선해협(1943)” 이상 3편의 필름을 발굴해 내는 쾌거를 이뤄낸다. 특히 “미몽”은 훌륭한 작품성으로 현존하는 최고의 발성영화라는 극찬과 함께 2007년 근대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이후 꾸준한 발굴작업으로 총 21편의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가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돼 있다.

당시 조사단에는 이효원 전 한국영상자료원 원장도 포함돼 있었는데, 추후 그의 회고록에서 “아리랑”에 대한 짤막한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튿날 회의 자리에서 그간 중국을 통해 입수된 한국 영화 관련 각종 정보에 대한 판단을 들었다. “아리랑”을 몇십만 달러에 건네겠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서신에 대해서는 그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며 화를 내곤 속지마라고 충고한다.····충고를 던진 첸 관장은 진메이에게 뭐라고 하더니 서류 한 장을 받아서는 나에게 준다. 그 서류에는 일렬번호와 함께 “군용열차” “어화” “집 없는 천사” “지원병” 등이 적혀있었다. 정신이 아뜩해졌다.”

이효인, 「해외에 숨겨진 한국영화를 찾아라! 국내 최고(最古) 영화 발굴기」

그렇다면 이제 다시 1970년대로 돌아가 보자. 그때부터 “아리랑”을 쫓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랑” 필름 찾기, 그 여정의 시작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인 1970년대 초 “아리랑” 필름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일본의 한 영상 수집가가 원본 필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아리랑”은 높은 작품성으로 해외에서도 정평이 나 필름을 수집하려던 사람이 많았는데 그런 수집가들 사이에서 ‘일본의 한 영상 수집가가 원본 필름을 갖고 있다’라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진 것이다. 소문의 주인공은 바로 일본 오사카 출신의 영상 수집가 아베 요시시게(安部善重)로, 그는 추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원본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면서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단 그가 필름을 소유하게 된 전말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가 1919년부터 1930년까지 한국에서 전염병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홍보영화의 제작도 겸했는데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하면 필름으로 대신 받기도 해 한국 영화 필름을 다량 보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때 수집한 수많은 필름 중에 “아리랑”도 있었고, 부친의 사망 후 아베 요시시게가 그것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실존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아리랑” 원본 필름을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선 기관은 일본 내 재일 조선인 단체, 바로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었다. 북한은 당시 2대 지도자로 내정된 김정일의 지독한 영화 사랑으로 세계 각지의 영화들을 수집하고 있었고 1974년에는 FIAF 정회원에 가입할 정도로 영화에 진심이었기 때문에 “아리랑” 원본 필름은 북한엔 보물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조총련은 “아리랑” 필름을 얻어내기 위해 당시 영화제작소장 여운각을 주축으로 아베 요시시게를 찾아가 북한 우표 세트와 개성 인삼, 천만 엔짜리 소니 영상 편집기 그리고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별방문권을 건네면서 반환을 요구했지만, 아베가 공산주의자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북한의 요구를 여러 차례 거절한다.

반면 한국은 그보다 조금 늦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아리랑” 필름에 관해서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NHK의 한 프로듀서가 아리랑 다큐멘터리 촬영 및 정보 조사 차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때 아베 요시시게라는 인물에 대해 한국에서는 처음 밝힌 것이다. 따라서 이후 나운규의 차남 나봉한 선생과 국내 아리랑 연구가 등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아베를 찾아가 반환을 요구했지만, 이때도 그는 ‘북한과 통일을 하면 주겠다’, ‘지금은 필름 더미에 숨겨져 있으니 나중에 찾으면 주겠다’ 등과 같은 발언으로 시간을 끌면서 계속 미뤘다. 이후 남한과 북한의 계속되는 반환 경쟁과 급기야 북한의 협약을 통해 “아리랑”을 환수해 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 요시시게가 이를 끝끝내 거절하면서 반환 작업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리고 아베 요시시게는 2005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아리랑” 필름의 행방은 미궁에 빠지게 된다.


과연 진실은 어디에

과연 아베 요시시게는 “아리랑” 원본 필름을 정말 갖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거짓말을 했던 걸까. 일단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맞다. 왜냐하면 2005년에 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하면서 갖고 있던 필름이 전부 일본 문화청에 귀속돼 그의 소장품을 조사한 적 있었는데, “아리랑” 원본 필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점은 “아리랑”은 고사하고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가 단 한 편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30년 동안이나 대한민국, 북한 그리고 일본까지 아시아 전역을 속인 희대의 거짓말쟁이였을까.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하기 전 그의 소장품 속에서 눈여겨볼 자료들이 그래도 꽤 발견됐기 때문이다. 1991년에는 그의 창고에서 친일 영화 “순정은 신과 같다(오카자키 다쓰시, 1927)”가 발굴되기도 했고, 1994년에는 아베가 영화를 보고 나서 직접 작성했다는 자신의 영화 목록 리스트를 한국 측에 전달하면서 60여 편이나 되는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 리스트가 국내 언론에 의해 최초로 공개되기도 했었다. 필름이 없어서 저평가됐을 뿐이지 그 속에는 제작사, 감독, 제작연도, 필름 피트, 권수, 배우 등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외에도 그가 1936년과 1945년에 “아리랑”을 봤다고 정확히 기억해 낸 점이나 1945년에 작성했던 수장 목록 중 ‘동양 영화 55번째, 아리랑/9권/현대극’이라고 적혀있었던 점을 고려해 보면 단순히 그가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면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왜 그는 죽을 때까지 한국 영화를 공개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항간에는 그가 “일본은 미국에 패전했지만 적대적이지 않는데 한국은 왜 일본에 유독 적대적이냐”, “나운규는 너희(한국)에는 영웅이었겠지만, 우리(일본)에게는 한 사람의 반일 분자일 뿐이다”와 같은 발언을 일삼은 것에 근거해 그가 보수 우익이기 때문에 일본에 저항하는 내용인 “아리랑”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베 요시시게가 당시 일본에서는 ‘전설의 컬렉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명망 높았고, 일본 역시 무성영화 잔존율이 10퍼센트대에 불과해 사실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그의 컬렉션에 대해 기대가 더 컸는데 막상 공개된 일본 영화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수장 목록에는 초창기 일본 무성영화의 남은 90퍼센트를 채울 정도로 방대했다고 하는데, 이렇다 할 대단한 일본 영화들도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아리랑” 필름이 발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만에 하나 “아리랑”의 원본 필름이 어딘가에서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상태로 발견될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다. 그래서 아베 요시시게도 필름을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보관하면서 추후 손상됐을 거라 보는 이들도 많다. 왜냐하면 초창기 영화들은 모두 질산염 필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질산염은 항온항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부패, 백화, 산화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라 장기간 보존하기 위해서는 흑백 필름의 경우 섭씨 10도 상대습도 20~50퍼센트의 환경에, 컬러 필름의 경우는 섭씨 영하 상대습도 20~30퍼센트의 환경에 보관해야 한다. 그런데 아베의 필름 창고가 굉장히 허름했다는 당시 기자들의 증언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당시 이 조건에 맞게 보관소를 만들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전쟁으로 인해 필름의 유실은 둘째치고 반세기라는 긴 시간이 지나면서 필름이 부패됐을 확률이 높다.

이외에도 실제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해방 전 일본군이 전쟁에서 화약 도화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한국 영화 필름을 모두 수거해 갔다는 설, 농부들이 필름을 가져가 밀짚모자의 테두리로 사용했다는 설, 고물상이 필름을 녹여 안에 있던 은을 추출 해냈다는 설 등은 초창기 한국 영화 발굴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는 요인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초창기 한국 영화 발굴

이러한 많은 문제와 한계에 다다르면서 현재 “아리랑”뿐만 아니라 초창기 한국 영화가 발굴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다행히도 발굴 작업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점은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 필름과 관련 자료가 그래도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가장 최근에는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이규설, 1920년대 후반 추정)”와 “온돌(조선총독부, 1941)”이 2019년 러시아 국립 아카이브 고스필모폰드(Gosfilmofond of Russia)에서 발굴된 바 있고, 2021년에 방영된 ‘KBS ‘TV 쇼 진품명품(1287회)’에서는 영화 “아리랑” 홍보 전단이 최초로 공개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2016년에는 ‘예술통신’이라는 잡지에 “아리랑”에 대해 평론한 미군의 글이 발견되면서 “아리랑” 필름이 미국이나 국내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었다.

과연 “아리랑”의 원본 필름은 어디에 있는 걸까. 1970년대부터 국내외 많은 기관이 찾기 시작했지만 50년 동안 단 한 장의 필름도 발견되지 않은 춘사 나운규의 역작 “아리랑”, 그저 전설 속의 이야기로 묻혀둬야만 할까.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쉽다. 시나리오부터 음반, 관련 기사, 평론 그리고 나운규의 글까지 필름만 빼고 발견될 수 있는 건 모조리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 바로 필름이다.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는 “아리랑”뿐만 아니라 초창기 한국 영화를 발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의 꾸준한 관심이라고 말하기도 한 만큼, 점점 잊혀지는 우리 ‘옛날’ 영화의 우여곡절을 다시 한번 들춰내며 글을 마친다.


이미지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한국방송, 시사저널, 조선일보, 연합뉴스, 뉴시스, 뉴스톱,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