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년 사이 급격하게 성장한 스니커 마켓, 각종 한정판과 장르를 가리지 않는 무수한 협업은 가히 스니커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방불케 했고, 매출액의 상당 부분을 운동화가 차지하고 있는 스포츠 브랜드 여럿이 치열한 각축전을 펼쳤다.
과거 나이키(Nike)와 아디다스(Adidas)가 양분하다시피 했던 구세대의 스니커 게임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주자들이 그 뒤를 바싹 쫓고 있다. 이제는 유행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고프코어, 20년의 세월을 지나 되돌아온 Y2K, 등산, 트레일 러닝과 같은 아웃도어 활동의 대중화 등 갖가지 요인과 함께 2000년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하이테크 스니커가 대두했고, 이에 뉴발란스(New Balance), 아식스(Asics), 살로몬(Salomon)과 같은 스포츠 브랜드가 스니커 신(Scene)의 중심축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간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스포츠 브랜드 푸마(Puma)가 게임에 새롭게 진입하며 스니커 마켓에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근래 푸마의 주력 스니커는 스웨이드(Suede), 클라이드(Clyde)와 같은 클래식 라인이 아니다. 이전부터 여러 패션 관련 매체에서 푸마의 드라이빙 슈즈 스피드캣(Speedcat)의 유행을 역설했고, 이를 빠르게 감지한 푸마 역시 대대적인 런칭 이벤트로 스피드캣의 귀환을 알렸다. 또한, 리한나(Rihanna), 에이셉 라키(A$AP Rocky)의 개별 라인에서도 옛 푸마 아카이브 속 스니커를 계속해 발굴하고 있으며, 여타 패션 브랜드 또한 그 궤적을 돌아보는 중이다. 푸마 스웨이드, 그리고 다시금 돌아온 스피드캣 사이 어떤 혁신적인 스니커가 있었을지. 그 아카이브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Mostro
1999년 처음 발매, 올해로 25주년을 맞이한 푸마 모스트로(Puma Mostro)는 디자이너 피터 슈미트(Peter Schmidt)에 의해 탄생했다. 모스트로란 이탈리아어로 ‘괴물’을 뜻하는데, 그 이름만큼 파격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으로 많은 이의 눈길을 끌었다. 날렵한 실루엣에 수백 개의 돌기로 이루어진 아웃솔, 비대칭 벨크로 시스템을 특징으로 하며, 실제로 어퍼는 80년대의 서핑 부츠, 아웃솔은 60년대 트랙 스파이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여러 미디어에 등장했는데, 당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아일랜드(The Island)” 속 여주인공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이 모스트로를 착용했고, 비요크(Björk) 역시 황금색으로 된 모스트로 알토 부츠를 착용했다. 최근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에이셉 라키, 스켑타(Skepta)가 모스트로를 신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여기에 이어 모스트로를 바탕으로 한 한국 브랜드 산산 기어(SAN SAN GEAR)의 협업 스니커 이미지가 유출되며, 모스트로의 복귀를 더욱 공고히 했다.
Mikoshi
모스트로 역시 독특한 디테일로 무장한 스니커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두 스니커에 비할 수 있을까? 공룡의 턱뼈를 연상케 하는 괴랄한 아웃솔, 슈레이스를 대신하는 플랩 클립을 사용해 착용하는 이색 스니커 미코시(Mikoshi)는 일본의 전통 축제 중 하나인 미코시 축제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미코시 축제는 수백 명의 장정이 신이 타고 있는 커다란 가마를 옮기는 큰 이벤트 중 하나로, 2005년 디자이너 레이 호라첵(Ray Horacek)이 그 가마꾼이 신는 지카타비(地下足袋)라는 버선을 본 따 미코시를 디자인했다. 실험적인 아웃솔과 인체공학적으로 제작된 단단한 캔버스 어퍼, 그리고 그 위를 유려하게 지나는 푸마 스티치까지, 단순한 구조로 완성되었지만, 그 어떤 스니커 못지않은 강한 비주얼 임팩트를 선사한다.
Satori
일본 문화에 영향받은 또 하나의 푸마 스니커로 사토리(Satori)가 있다. 발매 시기 또한 2004년으로 그 간격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사토리의 디자인은 일본 사무라이의 갑옷에서 그 외형을 빌려왔다고. 겹겹이 쌓여 있는 가죽 어퍼가 메인 디자인이며, 슬립 온(Slip On) 방식으로 편히 신고 벗을 수 있게 고안됐다.
푸마의 디자인 아카이브를 이야기할 때 종종 언급되는 소노(Sono)도 사토리와 유사한 형태로 제작되었는데, 몇 켤레의 샘플만 제작되었을 뿐, 결국 정식 발매되지는 못했다.
Kugelblitz
1999년 모스트로를 디자인한 피터 슈미츠는 2006년 자신의 넘치는 아이디어를 다시 한번 푸마 스니커에 주입한다. 커다란 공 모양의 아웃솔을 스니커 뒤축에 고스란히 넣은 쿠겔블리츠(Kugelblitz)라는 모델을 선보인 것. 쿠겔블리츠라는 단어 자체가 ‘구 형태의 번개’라는 독일어로 처음부터 이러한 형태의 아웃솔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듯하다.
레드 컬러의 쿠겔블리츠를 볼 때면 “아키라(AKIRA)” 속 카네다의 바이크가 떠오르기도. 지방시(Givenchy)의 러닝 슈즈 TK-MX도 쿠겔블리츠에서 디자인의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지금도 많은 스니커 컬렉터가 쿠겔블리츠의 부활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푸마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헤이코 데센(Heiko Desens)은 모 인터뷰를 통해 이런 상징적인 작품은 영감으로만 존재해야 한다고 밝혀 아쉬움을 사고 있다.
Disc Blaze
오늘 소개하는 푸마 스니커 중 아마 가장 친숙할 푸마의 디스크 스니커. 푸마의 그 어떤 스니커보다 높은 기술력을 담고 있을 것 같지만, 푸마의 디스크 시스템은 1991년, 그러니까 이들 중 제일 먼저 등장했다. 완벽한 피팅을 위해 끈이 아닌 스니커 내부에 삽입한 와이어로 갑피를 조이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스니커 중앙의 디스크를 돌리고 누르는 것만으로 원하는 핏을 조정할 수 있었다. 디스크 시스템을 탑재한 유명한 모델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디스크 블레이즈(Disc Blaze)지만, 디스크 웨폰(Disc Weapon), 디스크턴(Discturn) 등 다양한 파생 모델 또한 존재한다.
디스크 블레이즈는 유일무이한 디자인으로 여러 패션 브랜드의 협업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베이프(Bape), 아트모스(atmos)와 다수의 협업을 진행했고, 2014년에는 카시나(Kasina)와 함께한 ‘Kasina x Puma Disc Trinomic Lux’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Mihara Yasuhiro
1999년 푸마는 자사의 프리미엄 라인인 푸마 블랙 스테이션(PUMA Black Station)을 런칭한다. 스포츠웨어가 아닌 패션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으며,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을 비롯해 닐 바렛(Neil Barrett) 등 세계 최정상급의 디자이너를 파트너로 기용해 브랜드 내 변혁을 이끌었다. 그중 2001년 일본의 디자이너 한 명이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고, 그가 바로 미하라 야스히로(Yasuhiro Mihara)다. 푸마는 미하라의 디자인에 제약을 두지 않았고, 미하라 또한 그 자유를 만끽하며, 본인의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푸마와 미하라 야스히로의 첫 스니커는 ‘MY-1’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고, 이후 시리즈도 그 넘버링을 이어 무려 80여 개가 넘는 미하라 시리즈를 선보인다. 비록 모든 시리즈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푸마의 스니커 아카이브에 무수한 명작을 남기며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이외 90~0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스포츠 브랜드가 밀레니엄이라는 테마에 힘입어 수많은 하이테크 스니커를 쏟아냈다. 시간이 지나고 많은 브랜드가 조금씩 자사의 아카이브를 뒤적거리며, 당시의 유행에 부합하는 스니커를 종종 복각해 내놓았지만, 푸마에게는 그런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20년 전 세상에 등장한 선구적 디자인의 스니커가 제 시대를 만나 푸마 아카이브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좀처럼 식지 않을 것 같은 Y2K 트렌드의 흐름이 또 어떤 스니커를 끄집어낼지 조금 더 앞선 미래를 미리 점쳐봐도 좋겠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 @archivedpieces, @fullv1s1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