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소재의 레코드 레이블 라이트 인 더 애틱(Light in the Attic)이 소련 붕괴 직전과 직후의 우크라이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다룬 컴필레이션 레코드의 발매를 예고했다. 앨범 [Even the Forest Hums]는 1971년도부터 1996년도까지의 음악을 담았다. 총 18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레코드는 각 트랙의 발매 시기를 기준 삼아 연대순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포크, 록, 재즈, 전자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 라이트 인 더 애틱은 역동적인 우크라이나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역사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Even the Forest Hums]는 제작 도중 뒤바뀐 정치적,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초기 기획 단계와는 다른 결과물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블의 첫 의도는 음악적으로 비교적 덜 알려진 지역들의 음반들, 그리고 소련 시대 문화 산업 검열 정책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음반을 모으고자 한 것이었다. 자연스레 제작 과정에서 과거 소련에 함께 속해 있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음악을 모두 포함하였었지만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며 러시아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지역의 음악만을 다루게 되었다.
제작사는 레코드 제작이 전쟁 발발 이후 순식간에 논란이 될 만한 프로젝트로 변모했다고 기억한다. 이제 레코드는 단순 컴필레이션 작업에서 벗어나 현재의 복잡한 정치, 사회적인 맥락과 함께 읽히는 작업물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오늘, 그들의 현실과 강력하게 묶이게 된 것. 또한 우크라이나의 독자적인 역사를 반영하는 음악을 다루는 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소련 치하의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그리고 키이우는 어떻게 다른 음악 서사를 가지는지 또한 담아낼 도의적 책임까지 짊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선공개된 [Even the Forest Hums]의 첫 트랙, 콥자(Kobza)의 “Bunny”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당 곡은 1971년 발매되었기에 레코드의 첫 트랙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Bunny”가 컴필레이션 레코드의 처음을 알리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지역의 전통 음악에 서구의 록 음악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접목한 최초의 밴드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콥자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현대 대중음악의 시초 격으로 각인되어 있다.
또한 이들의 음악이 우크라이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콥자’라는 밴드명의 유래에 있다. 콥자는 ‘콥자(Kobza)’ 혹은 ‘반듀라(Bandura)’로 불리기도 하는 우크라이나의 전통 악기에서 따온 말로, 해당 악기를 연주하던 이들을 콥자르(Kobzar)라 불렀는데, 콥자르는 19세기 우크라이나 지역을 떠돌며 연주하고 노래하는 고대 음유시인과 같은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콥자르가 될 수 있는 조건 중 특이한 점은 오직 맹인들만 콥자를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1800년대 우크라이나가 30~40%에 육박하는 영아 사망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세기 우크라이나에서 아이가 죽음을 비껴간다고 한들 나쁜 건강 상태와 질병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고, 이에 많은 수의 사람이 맹인이 되었다. 맹인이 된 사람들은 농경 중심이던 우크라이나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적었기 때문에, 음악인이 되어 사람들의 사기와 기운을 북돋는 곡을 연주하게 하였다고 기록된다. 곧 콥자르는 독특한 레퍼토리의 음악으로 우크라이나의 지역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맹인 음악가들은 1930년대에 이루어진 스탈린의 정치적 숙청 영향으로 강제 구금되고 사살되었다. 이후 콥자르는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지만, 소수의 살아남은 이들이 조용히 연주법과 지식을 전수하며 가까스로 그 역사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잊힐 위기에 처했던 콥자르의 음악들은 1970년대 밴드 콥자의 탄생으로 부활하게 된다.
콥자의 성공에는 우크라이나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 말고도 전통 민속 음악을 서구권의 록 음악과 결합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이전까지는 다른 생산품과 마찬가지로 음악 역시 철저하게 검열되는 실정이었다. 오직 국가에서 허가를 받은 공연자들만이 까다로운 허가 절차를 거쳐 국가에서 운영되는 녹음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콥자가 활동했던 시기인 1970년대는 소련과 서구권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장 첨예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따라서 소련 연방의 사회학자들은 서구권의 모든 문화, 특히 록 음악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투쟁에서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변모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대중들을 도발했다. 당시 서구권의 록 음악은 1970~80년 갓 성인이 된 소비에트 청년들에게 큰 매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기에 비판의 강도는 더욱 거셌다.
위 자료는 1985년 소련 연방에서 발표한 ‘유해한 이데올로기적 구성 요소를 포함한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외국 음악가 및 그룹의 대략적인 목록’이다. 목록을 살펴보면 ‘11번 AC/DC – 네오파시즘, 폭력, ‘13번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 폭력, 종교적 몽매주의’ 같은 식이다.
그러나 엄격한 검열도 서구권의 음반이 소련으로 유통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수단으로는 엑스레이 판으로 LP판을 자체 제작하는 방식이었는데 당시 구할 수 있던 가장 값싼 플라스틱 재료 중 하나가 엑스레이 판이었고, LP로 제작하더라도 엑스레이 사진이 그대로 남아있어 의료품으로 눈속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1970~80년대의 소련 청년들은 서구권의 록 음악을 소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청년들은 소련의 관리들이 우려했던 방향으로 록 음악을 소비하지만은 않았다.
몇몇 러시아 연구자들은 엑스레이 판이 제작될 당시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다방면으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들이 소련 연방의 엄격한 검열을 피해 서구의 록 엑스레이 판을 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사회주의에 대한 반항심 때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며 소련의 고민 중 하나는 청년 세대들의 정치적 무관심이었다. 따라서 소련 연방이 어떤 식의 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를 앞세운다고 하여 그것이 청년들이 서구 록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에 어려웠다. 오히려 당시 소련의 서구 록 음악 애호가들은 록 음악과 국가가 승인한 시시한 팝 밴드들의 대립 구도를 부르주아 문화와 공산주의 문화 간의 대립으로 바라보지 않고, 교리적인 미학 형식과 미래지향적인 실험 및 혁신 사이의 대립으로 바라보았다고 러시아 출신 인류학 연구자 알렉세이 유르착(Alexei Yurchak)은 설명한다. 새로운 시대의 청년들에게 서구 록 음악은 반항의 대상이 아닌, 자신들이 꾸려갈 공산주의 국가의 더욱 세련된, 새로운 시대였고, 그들은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리고 서구 록 음악에 대한 이러한 시선이 바로, 우크라이나와 소련, 키이우와 페테르부르크의 음악이 다르게 성장한 이유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서구의 아방가드르하고 진취적인 록 음악을 이데올로기적인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는 20세기 우크라이나인들의 이주 역사와 관련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격동의 시기를 보낸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발발한 볼셰비키 혁명 이후 세계 1차 대전과 내전이 시작되며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주변 국가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세계 2차 대전 때에 이르러서는 스탈린의 정치적 박해와 계획된 기근으로 약 700만 명이 사망하게 되고, 또한 나치군의 점령으로 100만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아픈 역사를 겪는다.
이 시기에 수백만 명이 망명을 떠나게 되었는데, 피난민들은 먼 길을 떠나 매니토바와 디트로이트, 혹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에 정착하게 된다. 새로운 땅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디아스포라[1]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음악과 정착 지역의 음악을 섞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Even the Forest Hums]에서 포크, 록, 재즈, 전자음악이 두루 다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이다. 소련 붕괴 이후 만개한 키이우의 언더그라운드 신(Scene)은 이런 우크라이나 이주민들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서구에 뿌리를 둔 음악을 자신들의 음악으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바로 그 음악이 탄생한 곳들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새로운 위기를 맞이했다. 키이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DJ인 비탈리 바르데츠키(Vitalii Bardetskyi)는 레코드의 라이너 노트[2]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도 음악은 있다. 그러한 순간에도, 특정 선율 아래 모든 국가가 함께 통감한다”
이따금 비탈리가 “내 친구 중 한 명이 방금 전장에서 싸우다 죽었어” 혹은 “우리 지역에 전기가 며칠째 안 들어오는 중이야”와 같은 말을 동료들에게 건넬 때 전쟁의 위기는 바다 건너 미국에서 레코드 제작을 담당했던 짐 설리번(Jim Sullivan)과 같은 제작자들에게도 보다 현실로 다가왔다. 설리번은 회상한다. “이런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 나는 텍사스에서 나의 레코드판들과 강아지와 함께 앉아 있는데, 그들은 지옥 같은 순간을 지내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5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Even the Forest Hums]는 오는 10월 18일 공개된다. 라이트 인 더 애틱은 음반 수익의 일정 부분을 우크라이나 전쟁에 영향을 입은 지역들을 재건하는 데에 힘쓰는 자선단체 리브이 버라(Livyi Bereh)에 기부할 예정이라 밝혔다.
이미지 출처 │Light in The Attic,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