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국뽕’과 ‘애국심’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2002년 월드컵 스테디셀러 붉은 악마 티셔츠, 그 티셔츠엔 영어로 ‘be the reds’ 라 적혀있었다. 한국인에게 한글은 부담스럽기 때문일까? 우주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에서 한글로표현한 세련된 제품을 찾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다.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상봉 디자이너가 한글을 이용한 패션디자인을 선보였을 때도 하나의 이슈메이킹으로 끝났을 뿐. 타투 레터링을 할 때도 한글보다는 다른 국가 언어를 선호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외국인이 새겨넣은 한글 레터링 타투가 유머사이트에 돌아다니는 상황은 아이러니.
한국인이 한글을 사용하지 않는 국내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적지만 묘한 사례들이 근래 몇 년 사이 해외에서 목격되고 있다. 세계적인 트렌드 선두 그룹에 속한 브랜드에서 가끔 한글을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번 시간에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사례를 찾아 가볍게 산책하면서 과연 이것이 하나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Anti Social Social Club – Suicide Club Hat
2015년, 폭풍같이 등장해 유행의 중심에 우뚝 선 LA발 브랜드 안티 소셜소셜 클럽(Anti Social Social Club)의 ‘자살 Club’ 볼캡.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던 걸까? 안티 소셜소셜 클럽의 낯선 분위기와 의미를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자살’이라는 단어가 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 상당한 유행 아이템이 되었다. 이 브랜드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후에도 안티 소셜소셜 클럽은 태극기를 사용한 재킷과 볼캡도 출시하며 국내 소비자들에게 강하게 각인됐다.
Opening Ceremony – Varsity Collection
2002년에 설립되어 뉴욕, LA, 런던 등 대도시에 편집매장을 둔 오프닝 세리머니(Opening Ceremony). 2017 SS 글로벌 바시티 컬렉션에서 공개된 다양한 바시티 재킷 중 한국판 뒷면엔 한글로 ‘오프닝 세레모니’라 당당하게 적혀있다. 건곤감리, 한반도, 호랑이, 무궁화뿐 아니라 과거 정부 심볼을 단순화한 형태의 태극무늬까지 한국을 상징하는 것들이 잔뜩 들어가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스스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면 500불이 넘는 이 재킷에 투자할 가치가 있을 것.
Vans – 끝없는 빛
반스의 유러피언 스케이터들이 서울에서 촬영한 “Endless Light(끝없는 빛)” 스케이트보드 비디오는 이례적으로 끝없는 빛이라는 한글 텍스트를 타이틀 그래픽에 포함했다. 매우 소소한 사례지만, 글로벌로 발행된 스케이트보드 비디오의 타이틀에 한글이 삽입된 건 과거에는 없었던 일.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신(Scene)의 특성이 반영된 건 아닐까.
Nowhere FC – NwFC International Devils Scarf
지금껏 소개한 브랜드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노웨어 FC(Nowhere FC)는 마크 제이콥스와 슈프림에서 디자이너 경력을 쌓은 디에고 모스코소가 디렉팅하는, 최근 뜨겁게 타오르는 풋볼 컬처를 기반으로 하는 브랜드다. 매년 발매 제품의 규모를 넓히는 노웨어 FC의 이번 시즌 제품 중 ‘아무데도’라고 큼직하게 적혀있는 스카프가 눈에 띈다. 영어 타이포그래피를 한글에 적용하는 데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한글을 모르는 사람뿐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특별한 디자인으로 인식된다.
Boys of Summer
전설적인 스케이트보더가 죄다 출연한 스케이트보드 비디오 “Boys of Summer”와 전혀 연관이 없는 듯한 이 티셔츠 제품은 LA 편집숍 유니언(Union)에서 발매되었다. ‘Boys of Summer’를 직역한 ‘여름의 소년’이라는 문구가 띄어쓰기조차 틀린 채로 커다랗게 적혀 있는 게 매력 포인트. 함께 발매된 ‘SPA BOSS’ 티셔츠도 눈에 띄는데 한국의 때수건에서 큰 영감을 얻은 듯하다.
앞서 소개한 내용은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감은 아니고, 활용 사례도 적지만 분명,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다. 2013년, 슈프림에서 태극기가 박힌 스케이트보드 덱을 출시한 게 그 시작이었을까. 반사적으로 남들과 다른 걸 찾는 성향의 인간들이 동양의 새로운 소스를 찾아 나선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과거 외국으로 이주한 세대의 2세, 3세들이 해외 패션 산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모국의 향수가 깃든 호기심 어린 제안을 하는 것일까. 이유야 어찌 됐건, 재미난 일이다. 국내 브랜드가 꼭 한글을 사용할 의무는 없지만, 아직 덜 개척된 분야이기에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