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들리 카본(Bradley Carbone)은 언뜻 보면 느긋하고 차분하지만, 고집 또한 세다. 그는 그 고집으로 지난 10년간 스니즈 매거진(Sneeze Magazine)을 운영해왔다. 6년 전,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고로 신체가 마비되었지만, 브래들리는 역경을 이겨내고 하위문화의 흐름을 기록하는 대표적인 스트리트 컬처의 미디어인으로 거듭났다. 파트너이자 스니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닉 펜섬(Nic Fensom)과 함께 패션, 음악, 예술 그리고 스케이트계 최고의 인물들과 작업하며 그들을 둘러싼 스니즈만의 글로벌 커뮤니티를 구축했다.
이름대로 갑자기, 격렬하게 숨을 내뿜는 ‘재채기’처럼, 현시대 순간들을 날 것으로 포착하는 스니즈에는 브래들리와 닉의 고집이 깃들어 있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고집, 동시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고집 그리고 프린트를 향한 고집이다.
스니즈 에디터 외 스톤 아일랜드, 칼하트, 뉴에라 등의 컨설턴트로도 활약하는 브래들리의 일상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로 비롯된 자가격리 조치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그를 인터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몇 달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바깥세상이 가장 그립다고 하는 브래들리는 필자와의 소통을 환영했다. 이제부터 그와 오직 지금이기에 나눌 수 있는, 지금 해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스니즈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나?
난 콤플렉스(Complex)가 런칭했을 때 매체의 포토그래퍼로 일을 시작해서 에디터가 됐다. 닉이 스니즈를 런칭할 당시 관심이 생겨서 지인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아마 스니즈 이슈가 서너 개 나온 이후였을 것이다. 닉과 친구처럼 만나다가 파트너가 되었고, 같이 일한 지는 10년이 넘었다.
지난 10년간 스니즈 편집자로 활동하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표지 하나만 꼽자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니즈 표지는 이기 팝(Iggy Pop) 커버다. 2012년에 발행한 스니즈 14호다. 이기 팝의 마이애미 저택에서 촬영했는데, 그가 데이비드 보위나 유명한 여자 친구들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음악계의 전설인데도 그 어떤 허세 없이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줬다. 스니즈를 통해 수많은 인물과 촬영했지만, 이기 팝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의 인간미 덕분이다.
유년 시절부터 스케이트, 서핑, 그리고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당신은 스니즈를 통해 꿈을 이룬 셈인가?
나는 스투시 같은 브랜드를 취급하는 서핑숍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를 둘러싼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방에 포스터를 붙일 정도로 좋아했던 프로 스케이터, 서퍼들을 직접 만나는 건 뭔가 미친 경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켈리 슬레이터(Kelly Slater), 에릭 엘링턴(Erik Ellington), 테르예 하콘센(Terje Haakonsen) 같은 사람들.
스니즈의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거대한 타블로이드 사이즈일 것이다. 인쇄 크기는 어디서 영감을 얻은 것인가?
우리는 스니즈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물질적 오브제가 되는 페이퍼 잡지라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인쇄 크기는 그저 신문에서 영감을 얻은 건데, 큰 종이를 좋은 사진과 콘텐츠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지극히 단순한 아이디어다.
오늘날 패션계는 미디어와 브랜드를 불문하고 환경지속성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다. 그래도 프린트를 고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스니즈의 모토는 ‘Less is more’이다. 우린 최소한의 페이지에 최대치를 보여주려고 한다. 잡지 내 모든 사진, 그림, 글은 아주 치밀하게 선별되고, 많지 않은 장수 안에 모든 스토리텔링을 한다. 솔직히 여느 매체가 디지털만을 고집하는 그 이유가 온전히 환경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프린트를 진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스니즈도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이 있긴 하지만, 온라인을 프린트만큼 중요시하지 않는다. 나와 닉도 개인적으로 소셜 미디어를 활발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인터넷은 너무 어수선하고 부대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팔로워를 잘 활용하는 매체도 있지만, 우린 지금처럼 프린트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유스 컬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꾸준히 변화하고 있다. 현재 스니즈가 가장 주목하는 유스 컬처 컬렉티브나 인물, 도시가 있다면?
닉은 밴쿠버, 나는 뉴욕 기반이다 보니 우린 자연스럽게 그 두 도시에 집중하게 된다. 다른 도시들도 저마다 서브컬처 붐이 있겠지만, 어쨌든 우린 항상 뉴욕의 관점으로 흘러간다. 아무래도 뉴욕이 상업이나 창조적인 면에서 모든 문화권이 거쳐 가는 중심지니까. LA, 마이애미, 런던, 베를린, 도쿄, 서울도 눈에 띄지만, 스니즈 내에서 다른 도시 콘텐츠는 일종의 ‘원 오프’ 기획이라면, 뉴욕 콘텐츠는 항상 자리에 있어야 한다.
뉴욕, 특히 뉴욕 패션계는 ‘문화적으로 죽었다’라는 말이 많다. 코로나19 록다운의 여파로 더욱더 얼어붙은 뉴욕의 서브컬처가 다시 컴백할 수 있을까?
뉴욕은 아이디어의 중심이고, 앞서 말했듯 모든 문화권이 거쳐 가는 곳이다. 무언가가 세계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뉴욕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뉴욕 패션위크의 영향력이 최근 뒤처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30년 전의 뉴욕 매거진(New York Magazine) 표지를 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우리의 크리에이티브 컬처는 끝났다”라는 둥, 부정적인 뉘앙스의 기사나 말은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 어느 매체나 인물이 “뉴욕은 죽었다”라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아직 뉴욕이 살아있다는 증거 아닐까? 코로나 록다운 이후에도 뉴욕의 서브컬처가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 문화 안에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에게 해줄 조언이 있다면?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할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남들보다 빨리 앞서간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달할 수 있다. 이쪽 세계는 밖에서 봤을 때 무척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저 재밌거나 멋진 일을 벗어나 그 전 단계의 드러나지 않는 일도 해야 한다. 작업할 때 본인의 이미지나 이익만 챙긴다면, 나중에 그 어떤 일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스니즈가 최근에 발매한 리복(Reebok) 협업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특별히 ‘클럽 C’ 스니커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리복이 스니커계의 언더독이라 함께 작업하는 게 재미있었다. 언더독인 만큼 모델도 예상치 못한 실루엣으로 정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고른 게 ‘클럽 C’다. 한 1여 년간 작업한 결과물인데, 발매가 코로나 사태와 겹쳐서 캠페인은 세계 곳곳에서 찍은 스케이트 트릭을 하나의 영상으로 연결할 것이다. 지금 편집하고 있는데, 이 기사가 나올 때쯤 공개됐겠다. 어릴 때 엄마한테 리복 펌프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끝내 안 사주신 기억이 있다. 하하.
당신은 신체마비 장애인으로서 장애 친화적 패션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스스로 휠체어 때문에 하이톱 운동화를 못 신는다고 했는데, 이번 리복 협업을 구상할 때도 그 점을 고려했는지?
꼭 그렇진 않다. 리복 ‘클럽 C’가 로우톱인 건 맞지만, 장애인을 고려해서 그 모델을 택한 건 아니다. 나는 스니즈 팀의 일원일 뿐이다. 모든 스니즈 관련 프로젝트는 매체 고유의 정체성만을 고려한다.
Nic Fensom with Reebok Club C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자가격리를 이어오면서 일상에 그리고 스니즈에 일어난 변화는?
사실 큰 변화는 없다. 워낙 세계 각국의 브랜드, 인물들과 작업하다 보니 대부분의 스니즈 콘텐츠도 화상이나 전화, 이메일로 계획한다. 록다운 초반에는 나도 친구들과 화상통화를 진행하며 같이 저녁을 먹거나 했는데, 한 달 반이 지나니까 격리도 익숙해졌다. 최근 발행한 ‘The Jackboys’ 이슈도 바로 매진돼서, 사람들이 오히려 지금 시국에 스니즈를 더 빨리 보고 싶어 하는 거 같다. 집으로 배달되는 스니즈는 마치 바깥세상과의 연결고리라고나 할까.
격리 중에 새롭게 발견한 영감이 있을까? 음악, 영화 혹은 책이라든지.
몇 달째 종일 집에만 있으니 시간 개념이 없어진다. 종일 TV만 보면 안 되니까 넷플릭스 같은 건 거리를 두고 자제하는 편이다. 하지만 볼거리를 꼭 꼽자면, 이탈리아 마피아를 다룬 드라마 “고모라”를 추천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스케이트 커뮤니티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 것 같나? 스케이트도 ‘언택트’와 공존할 수 있을까?
스케이트 커뮤니티의 큰 일부는 스케이트보딩을 통해 서로 교제하는 것이다. 혼자 탈 수도 있지만, 친구들과 서로의 트릭을 비교한다든지 일종의 ‘어울림’이 중요하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 스케이트를 즐길 순 없지만, 어쨌든 소셜 미디어로 연결되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전부터 말이다. 이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스케이터도 팔로우하고 그의 영상을 보고 공유할 수 있다. 우린 문화적 집단으로서 이미 ‘언택트’와 공존하기 시작했는데, 코로나 사태가 그 사실을 좀 더 선명하게 조명했을 뿐이다. 스케이트에 팬데믹(Pandemic) 컬처가 더해진 거지.
당신은 6년 전 스노보딩 사고로 신체가 마비된 이후 삶에 대한 관점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개인적으로 큰 트라우마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코로나19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나는 오래전 버몬트에서 스노보드를 타던 중 추락해서 목이 부러졌다. 신체마비로 지금도 전동 휠체어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당연히 무척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수년간 물리치료와 정신치료를 받으며 버텼다. 그 경험에서 배운 건,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체마비 같은 극단적이고 심한 수위의 트라우마를 겪으면, 인생의 나머지 것들은 비교적으로 가벼워진다. 내 감정적 한도 그리고 내가 참고 버틸 수 있는 한계가 높아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코로나가 처음 전염되기 시작했을 때, 맹목적인 두려움이나 충격을 느끼기보다는 일단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어떤 어려움에 반응할 때, 혼란에 빠지는 대신 ‘현재’, 그리고 그와 마주한 나의 상태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자선 활동은 따로 안 하는지?
LA 브랜드 본 x 레이즈드(Born x Raised)의 컨설팅을 많이 하는데, 브랜드가 최근에 발매한 마스크의 일부 수익을 ‘노 키드 헝그리(No Kid Hungry)’ 단체에 기부했다. 그리고 유니언 로스앤젤레스, 스탁 엑스와 함께 본 x 레이즈드 커스텀 에어 조던 1을 레플했는데, 수익의 90%를 의료진에게 기부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단골인 뉴욕의 식당이나 바버숍에도 최대한 많이 기부하려고 노력한다. 동네 친구들이 운영하는 곳도 있으니까.
자가격리가 끝나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이 복귀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그냥 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손 흔들며 인사하고 얘기하고 싶다. 친구와 동료 그리고 개성 있는 뉴요커들이 그립다. 전 세계 커뮤니티들이 이 시간을 이겨내고 더 좋은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
에디터 │이윤정(Elaine YJ Lee)
사진 │Bradley Carbone, Nic Fensom
*해당 인터뷰는 지난 VISLA 매거진 종이잡지 1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VISLA Paper는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