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미래파 패션 거장 Paco Rabanne, 88세의 나이로 작고

지난 2월 3일 스페인의 미래주의적 패션 장인 파코 라반(Paco Rabanne)이 88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오늘날 파코 라반은 플라스틱과 금속성 소재의 파격적인 활용, 화려하게 빛나는 스팽글, 관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실루엣의 장인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1934년 출생한 파코 라반은 발렌시아(Balenciaga)가 하우스의 수석 재봉사였던 어머니의 영향 아래 의복과 관련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모국 스페인의 정치적 혼란 가운데 그는 다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이는 그가 반골적 기질과 현실 도피적 성향을 갖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관심을 갖게 된 초자연적 경험이나 신비주의, 점성술 등은 이후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파코 라반의 독특한 디자인 세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됐다고.

파코 라반은 패션이 아닌 건축을 전공하며 조각이나 공예를 먼저 배웠는데, 때문에 재료와 기술, 형식 실험에 깨어있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발렌시아가, 지방시(Givenchy),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 등 유명 쿠튀르 하우스를 위한 액세서리와 코스튬 주얼리를 제작하였는데 뜻밖에 이 활동이 그에게 유명세와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준다. 그는 본격적으로 실험적인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볼레로 등 전통적 의상들을 새롭게 제작하기 시작했고, 1966년 마침내 문제의 컬렉션 ‘새로운 현대적 재료들을 사용해 만든 입을 수 없는 의상 12벌(Twelve Unwearable Dresses Made of Contemporary Materials)’이 탄생한다.

이 컬렉션에서 파코 라반은 플라스틱과 금속 소재를 전격적으로 사용하며 파리 패션 쿠튀르의 오랜 전통을 깨뜨렸다. 그는 당시 액세서리나 산업재로 사용되던 플라스틱에 구멍을 뚫고 금속 고리로 연결하며 옷을 만들었는데, 이는 소재의 구분이 사라진 새로운 패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망치와 펜치, 절단기를 들고 반짝이는 금속과 플라스틱을 재료 삼은 파코 라반의 의상은 당시 거의 컬트에 가까웠다. 코코 샤넬(Coco Chanel)은 라반을 단지 금속공(metalworker)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라반은 오히려 자신이 디자이너보단 장인이라고 불리길 원했고, 마리 끌레르(Marie Claire)와의 1967년 인터뷰에선 그런 평가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의상들은 무기입니다. 잠글 때 리볼버의 방아쇠 소리가 납니다.”

파코 라반은 디자이너라면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한평생 그 소신을 따르고자 전념했다. 미래파 패션을 이끌던 아방가르드 기수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남겼던 유산을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을 것.

Paco Rabanne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이미지 출처 | Paco Rabanne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