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Artists’는 VISLA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시각예술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6인의 아티스트를 선별,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시리즈다. 세 달에 한번 계간지로 펴내는 페이퍼 매거진에 포스터 형식으로 부착할 수 있도록 제공되던 작품과 그들의 배경을 살펴보는 짧은 질의응답은 이들이 더 많은 독자에게 알려지길 바라는 뜻으로, 이제부터는 VISLA웹사이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이는 질서와 무질서, 완전함과 불완전함, 유머와 철학 등 상반된 두 가치의 경계에 서서 작업을 옮기는 작가 이구치 히로시(Hiroshi Iguchi). 그가 두 가치를 대조하면서 발견하고 제시하는 관점은 감상자에게 신선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영감의 원천과 그의 작업 철학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창적인 스타일의 점묘화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스타일을 완성한 계기가 있다면?
나는 컴퓨터 시스템의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균형에 관심이 있다. 예를 들자면, 시스템의 버그와 오류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반면, 음악의 글리치, 즉 결함은 순간적인 흥분과 동시에 기쁨을 준다. 하지만 이 두 현상이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과 그것들을 다르게 만드는 유일한 건 우리의 인식이라는 점이 나를 매료시킨다. 나는 글리치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컴퓨터의 도움으로 내가 지닌 모호하고 불확실한 관점을 포착하려고 한다. 모든지 쉽게 질리는 경향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뭔가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받고 그것을 진심으로 즐긴다. 이진법에서 1과 0 사이의 역학을 생각할 때 느끼는 쾌감과 비슷하다.내 컬렉션의 이름을 ‘구멍(Holes)’이라 지은 배경에도 많은 아이디어가 숨어있다. 내가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 때 무렵, 비틀스(The Beatles)의 1968년도 만화영화 “노란 잠수함” 을 보고 있었는데, 시선을 사로잡은 특별한 장면이 있었다. 비틀스의 멤버들이 드나드는 끝없는 검은 점의 바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완벽한 원은 너무나 단순하고 깔끔하지만 극적이고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것이 구멍의 숨겨진 콘셉트 중 하나다. 결국, 검은 점은 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그리고 그 점을 그리는 일이 그 바깥에 있는 것, 즉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궁금하다.
궁극적으로 변한 건 없지만, 내가 좋아하고 또는 하고 싶은 일에 접근하기 훨씬 쉬워졌단 느낌을 받는다. 색다른 관심사를 좇으며 아예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주제가 겹치거나 왠지 모를 이유로 이어져 있는 관계성을 찾는 것을 즐거워하는데, 실은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가끔 너무 신나서 헉 소리가 절로 날 때가 있다. 창작하는 일이 내게는 이런 경험을 기록하는 방법 중에 하나인 셈이지.
본인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컬트 사인’은 철학자와 코미디언의 두 가지 면모에서 착안한 이미지라고 들었다. 철학과 유머, 한 가지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컬트 사인’의 앞면에는 완고하면서도 현명한 늙은 성인이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뒷면에 보이는 것은 손 팻말의 실루엣이다. 재미와 희극적인 면을 나타내지. 내게 철학자와 코미디언은 모순되는 두 요소를 대변한다. 대조적인 요소가 만들어내는 깊이와 이분법을 포착하는 것이 내 평생의 주제다. 마찬가지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이란 개념에 끌렸다. ‘컬트 사인’은 완벽한 균형으로 표현된 두 가지 요소로 그 이중성과 영원을 표현하려는 일종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의류에 본인의 작품을 프린트하는 작업은 순수하게 창작을 위해, 자기만족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
순수미술이건, 아트워크이건, 옷이건, 드로잉이건, 그 원동력은 한 곳에서 나온다. 내가 영감을 받지 않는 이상 나는 아무것도 창작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만약 일반 대중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일 때, 예를 들어 옷을 디자인할 때는 내가 하는 예술적인 선택에 조금 더 신경을 쓰려고 한다.
패션 장르와 본인의 작업 사이의 연관성이라고 한다면?
모든 건 음악으로 시작되고, 음악으로 끝난다. 패션은 그 길을 따르다 그저 가끔씩 오고 가며 마주치는 일과 같다.
초기 작품과 지금 사이의 간극을 말해 달라.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작품을 자신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보았지만, 동시에 내 흔적을 지우 려고 노력했다. 이제 와 깨달은 것은 내 작품이 질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타일을 바꾸곤 했다. 과거의 작업은 그 당시 유행을 딱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만들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지금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돌아볼 수 있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인 작업을 할 때와 직업으로서 작업할 때 쓰는 뇌는 아마 다를 것이다. 결과는 다른 관점을 전달하지 만, 두 매체에는 분명 공통적인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무의식의 수준일 수도 있지만, 그것들을 만든 사람은 한 명이기에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개인 작업과 전문 적인 작업에 애매하게 접근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분리하는 데 점점 더 능숙해지 고 있다. 그 둘의 경계는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음악은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가?
음악은 내가 길을 헤매고 있을 때 올바른 답을 주는 존재다.
근래 진행 중인 작업이나 계획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언급 부탁한다.
슬프게도 2020년 홍콩과 취리히에서 열릴 개인전이 모두 취소되었다. 지금은 다음 전시회 준비와 함께 새로운 실험을 해보고 있다. 그중 일부는 개선을 위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도록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한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언급하자면, 근래에 들어 나는 개인적인 문화의 뿌리를 더 많이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더 깊게 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부분적으로는 온라인에서 만나는 해외 친구들 덕분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나보다 일본 문화에 더 빠삭한 것을 보면 정말 놀랍거든. 우리가 결코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건 매우 신나고 흥분되는 일이다, 마치 내 나라의 문화에 아직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처럼. 문화는 ‘나의 문화와 타인의 문화’, 혹은 ‘일본 문화와 외국 문화’처럼 쉽게 나눌 수 있는 것 이 아니니까. 종종 그 선이 흐려질 때도 있고,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최근 내 작업의 주제로써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이다.
Editor│한지은
Image│Hiroshi Iguchi
*해당 인터뷰는 지난 VISLA 매거진 17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