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연속적 시간 속 불연속적 순간, ‘안티플롯’이 매력적인 영화 3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나열해 보자. 시나리오, 연출, 영상, 배우, 대사, 음향, 조명 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면 영화를 만들어 내는 최소한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연결하며, 영화의 진행을 관통하는 축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서사(narrative)’다. 

로버트 맥키(Robert McKee)의 전설적인 저서 ‘스토리(Story)’에 따르면, 영화의 서사구조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기승전결에 따른 전통적인 서사 구조인 ‘아크플롯(Arch Plot)’, 아크플롯을 미니멀하게 축약시킨 ‘미니플롯(Mini Plot)’, 그리고 이번 기사에서 다룰 ‘안티플롯(Anti Plot)’이 그것이다. 아크플롯에서 쓰인 접두사 ‘arch’가 ‘으뜸’ 혹은 ‘근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만큼, 사람들이 플롯 혹은 내러티브에 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 아크플롯을 떠올린다.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한 명의 주인공이 외적 갈등을 마주해 역경을 헤쳐나가는,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를 따르고 있다. 반면, 안티플롯에서는 사건의 선후관계와 연관성이 모호하고, 사실성이 부족하며, 비연속적 시간 속에서 우연에 의해 불연속적인 순간들이 무작위로 배치되어 있다. 

안티플롯은 아크플롯의 반대 선상에 위치한 개념으로,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현대 과학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안티플롯 영화는 우연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집중해 난해하고 어렵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온전히 담아내기도 한다. 일관되지 않은 사건들 사이에서 떠다니는 듯한 재미가 있는 안티플롯 영화 세 편을 함께 감상해 보자. 

1.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 – 짐 자무쉬(Jim Jarmusch), 1984

뉴욕 빈민가에 사는 윌리에게 부다페스트에서 사는 사촌 동생 에바가 찾아와 둘은 열흘간 함께 살게 된다. 처음에는 에바를 성가셔하던 윌리는 막상 에바가 떠나려 하니 아쉬움을 느낀다. 1년 후, 윌리는 친구 에디와 함께 에바를 만나러 클리블랜드로 무작정 떠난다. 클리블랜드에서 다시 만난 세 사람은 플로리다로 향한다. 하지만 윌리와 에디는 경마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 화가 난 에바는 무작정 모텔을 나가버린다. 에바는 이때 우연히 큰돈을 얻게 되며, 돈의 일부와 편지를 남기고 공항으로 향한다. 윌리는 에바를 찾기 위해 부다페스트행 비행기에 올라타고 에디는 그런 윌리를 비웃으며, 세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천국보다 낯선”은 짐 자무쉬의 세 편의 단편영화 “신세계(The New World)”, “1년 후(One Year Later)”, “천국(Paradise)”를 모아서 만든 장편 영화이다. 그래서인지 유려한 서사와 단단한 플롯보다는 아무런 설명 없이 시간이 1년씩 훌쩍 흐르기도 하는 등 사건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게 느슨하게 짜여 있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으로 구성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영화가 제작된 70~80년대 미국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이민자가 쏟아지던 시기이다. 미국에 이미 터를 잡고 살던, 이제 막 미국에 도착하여 조금씩 적응하고 있든 간에 외지인에게 미국은 헤어짐과 만남이 너무나도 쉽고 적응하기 어려운 낯선 나라였다. “천국보다 낯선”에서는 일상적인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주는 것으로 격변의 시대에 인간이 느끼는 공허함과 허무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2.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1997

프레드는 클럽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음악가로, 아름다운 아내 르네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그들의 관계는 삐걱거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익명의 우편물이 집으로 발송되고 그 안에는 프레드와 르네가 살고 있는 집안을 비추고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어있다. 비디오테이프 속 프레드는 르네를 죽이는데, 이 장면에서 순식간에 비디오테이프의 내용과 실제 현실이 얽히며 프레드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 갇힌 프레드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의 자리는 피터라는 한 젊은 정비공이 차지하고 있다.

프레드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첫 번째 이야기와 피터의 시점에서 묘사된 두 번째 이야기는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며 진행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프레드가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피터가 되고, 프레드의 아내 르네는 관능적인 여성 앨리스가 되어 피터를 유혹하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는 이러한 서사 구조를 강조하듯 비슷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영화의 시작에서는 고속도로를 보여주는데, 이 이미지는 영화의 끝부분에도 등장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두 이야기가 신비롭게 엮여있는 “로스트 하이웨이”에서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등장인물의 자아 분열 속을 탐색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3. “인히어런트 바이스(Inherent Vice)” – 폴 토머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2014

사설탐정 닥은 전 여자친구 샤스타의 부탁으로 억만장자 부동산 거물 미키 울프먼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미키와 샤스타의 실종으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닥은 옛 애인과 미키 울프먼의 실종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한 조사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골든 팽’이라는 비밀스러운 조직을 알게 된다. 사건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골든 팽’에 가까워지는 닥은 ‘골든 팽’의 실체를 밝혀나간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미국 포스트모던의 대표 작가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그래서인지 토머스 핀천 특유의 음모론, 시대적인 상징, 은유,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편집증적인 스토리, 산발적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등장인물들에 넋을 놓고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이뿐만 아니라 70년대 미국의 히피문화와 냉전 체제로 인한 사회 변화 등 다양한 시대적인 코드를 읽는 것도 영화를 감상하는 흥미로운 포인트.

아무리 서사를 해체하고 조각내도 영화의 형식 안에서는 반드시 이미지의 상호작용이 생겨나며, 관객은 개별 이미지를 어떻게든 연결해서 받아들인다. 앞서 소개한 세 영화, “천국보다 낯선”, “로스트 하이웨이”, “인히어런트 바이스”, 에서는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연결하며 비선형적 구조 사이를 헤엄치는 재미가 있다. 고전적인 플롯을 따르지 않는 안티플롯 영화들은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기에, 직접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미지 출처 | IMDb, Montana Film Festival, Rotten Tomatos, Alamo Drafthouse Cinema, The Arts Desk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