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RECORD – #5 TIME WARP 시간을 극복한 레코드와 동시대

레코드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다행히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며칠 후 찾을 수 있었고요. 분실 다음 날엔 정말 황망한 기분이었어요. 해가 질 때까지 온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다녔고, 저녁쯤 체념의 단계로 접어들게 됐죠. 그리고는 가방에 어떤 레코드가 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사려고요. 그런데 셋을 짜서 음악 트는 건 별로 선호하지 않아, 가져간 레코드 중 일부는 영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웹상에 남은 모든 기록을 뒤졌습니다. 2년간의 구매내역과 로컬 오프라인 스토어의 SNS 계정을 낱낱이 살폈고, 그중 제가 가방에 넣은 레코드의 목록을 작성했습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날따라 왜 이리 신보를 덜 챙겨갔는가, 였어요. 요즘 나온 음반을 잃어버린 것도 무척 아쉽지만 뼈아프진 않았어요. 그보다는 최근 구매한 90년대 프로그레시브 하우스, 트라이벌 트랜스 계열의 레코드가 없어진 게 너무 속상했고요. 그게 지금 제 ‘동시대’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웹상의 정보를 확인하다 잃어버린 레코드 중 한 장에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1994년 발매된 해당 싱글에 대한 모 저널리스트의 짧은 평가를 그대로 옮겨온, 2019년에 달린 댓글이었습니다. “겨우 쓸 만한.” 간결한 혹평이죠. 누군가 2018년에 쓴 아래의 댓글도 재미있습니다. “왜 이렇게 이 웹사이트 사용자들의 평가가 낮은지 이해하기 어렵다. 세월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을 만한 베이스라인, 멜로디 등 여러 요소가 돋보인다.” 실제 판매 기록을 보면 서서히 레코드의 가격이 상승 중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고가로 구분할 정도는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저널리스트의 평가가 절대적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렇게 들렸을 수 있고요. ‘Test of Time’이란 관용구는 레코드를 구입하다 보면 꽤 빈번하게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세월이나 시간의 시험이라는 뜻으로, 시간이 지난 후까지 가치가 지속되거나 혹은 시간이 흐른 후 비로소 그 가치를 발견되는 음반에 따라붙곤 하죠. 사전적 의미는 전자에 가깝지만, 오히려 레코드 애호가들은 후자의 의미로 더 자주 사용하는 듯합니다. 전자는 정의하기 쉽습니다. 말 그대로 ‘Timeless’겠죠. 명반이라 일컫는 대부분의 음반을 우리는 타임리스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 반면 레코드를 모으며 특히 기쁜 순간은 후자, 즉, 시간이 흐른 뒤 그 매력을 찾게 되는 음반을 만날 때인 것 같습니다.

단, 이것은 재평가나 몇몇 매체에서 종종 벌이는 새로 점수를 매기는 일과는 좀 다른 듯합니다. 재평가라면 음반의 창조적 진가, 만듦새, 시대적 의의 등이 그 근거가 되겠죠. 유행의 귀환과 비교해도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유행의 귀환이나 레트로는 보통 그 시대의 정수를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니까요. 그보다 이 ‘후자’의 경우는 음반에 당대를 반영하는 특정 미덕이 존재하는데, 그 미덕이 현재의 관점에서 갑자기 또는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일에 가까운 듯합니다. 예시로 든 1994년의 싱글을 현대의 저널리스트나 음악가가 듣는다 해도, 그 평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댓글의 언급처럼, 이 레코드는 ‘Test of Time’을 조용히 잘 버텨냈고, 그런 평과 별개로 부지런한 (보다시피 이미 저보다 몇 년이나 빠른) 레코드 애호가들에 의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된 셈이죠.

실로 이런 발견은 몹시 흥분되는 일입니다. 마치 새 차원의 포털로 향하는 입구를 마주한 기분이 들거든요. 이를테면 90년대를 상징하는 사운드 모듈 JV-1080의 가짜 봉고 및 콩가 퍼커션 소리가 실연보다도 더 멋들어지게 들린다거나,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에 비해 한참 차가운(상대적이지만 차이는 분명한) 디지털 신스 아르페지오의 ‘맛’에 빠지는 과정을 거치며, 자신에게 낯선 레코드 섹션을 선뜻 구축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전에 없던 세계가 생기면 종종 페이스가 처지곤 하는 레코드 발굴에 다시 불이 붙기도 합니다.

한편 희미하던 것들을 정확히 알게 되기도 합니다.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의 ‘프로그레시브’는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의 ‘프로그레시브’와 같은 의미로 출발한 말입니다. 실험과 진보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프로그레시브 하우스 트랙의 고조되는 전개를 칭하는 수식어로 흔히 쓰이는 추세죠. 2010년대 이후 협의의 EDM 중 한 축을 차지한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의 영향이 클 것입니다. 이처럼 절대적인듯한 용어의 뜻마저 변하는 상황에서 남들의 평가, 나아가 커버나 크레딧에 적힌 정보는 참고용 이상의 의의를 갖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예컨대 힙합의 골든 에이지는 80년대 부기 다운 프로덕션과 쥬스 크루의 시대인가요, 90년대 ‘먹통 힙합’의 시기인가요? 또는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에 대한 편견이 강하다면, 90년대 댄스 음악 사운드에서 기절한 만큼 싫은 부분이 있어서 그 섹션을 줄곧 피한다면, 혹은 낮은 사용자 평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이렇듯 ‘Test of Time’을 지나 빛을 볼 수 있는 레코드를 만나고 그 덕에 생경하지만 흥미로운 세상으로 진입하는 경험을 얻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레코드란 매체 탄생 시점 이후의 웬만한 정보에 모두가 수평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요즘, 동시대라는 말이 꼭 당장 2022년만을 뜻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내가 지금 주의 깊게 보는 것,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세상에 제안하는 재미있는 주제가 결국 ‘동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재평가나 유행과는 다른, 나만의 세계에서 뻗어나가는 취향과 소비 공동체를 그 기반으로 하겠죠. 오늘 좋아하는 것을 좇고, 하필 거기서 한발 빠른 사람들을 만나 배우고, 비슷한 음악을 탐험하는 부류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이런 즐거움 속에 저의 동시대는 당연하게도 계속 변해왔습니다. 원고와 더불어 공개될 이번 플레이리스트에는 특히 자주 매료된 90년대로 한정해 여러 장르, 여러 동시대의 레코드를 골라봤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방 속, 레코드 선반 위의 동시대는 언제인가요? 


Writer │유지성(Jesse You)

*해당 에세이는 지난 VISLA 매거진 20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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