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봄을 위한 슬래커록 앨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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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화사하기만 한 봄을 만끽하기에 가장 좋은 음악은 아마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로맨틱한 노래들일 것이다. 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온 따사로운 날씨 탓에 봄은 한없이 늘어지고 싶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싶은 날. 이 기분에 공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음악 선택지가 있다. 로파이(lo-fi)한 질감,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의 보컬, 여유롭고 늘어진 분위기. 한가함의 달인들의 봄을 함께 맞아줄 ‘슬래커록(slacker rock)’을 소개한다.

슬래커록(slacker rock)은 8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된 인디록의 하위 장르로,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나가기를 꺼렸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슬래커(slacker)’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 문화에서 파생된 슬래커록은 8~90년대 X세대로부터 발전되었으며, 악기를 대충 연주하거나, 의도적으로 튜닝을 나가게 해서 미완성된 느낌을 주기도 하고, 빠르지 않은 박자와 테이프의 왜곡을 활용한 로파이한 질감을 특징으로 한다. 편하게 읊조리는 보컬에 디스토션이나 기타 앰프를 걸어 특유의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때로는 너드적 매력을 가미하기도 한다.

90년대 슬래커록을 시도했던 대표적인 아티스트는 세바도(Sebadoh), 페이브먼트(Pavement), 스파클호스(Sparklehorse), 벡(Beck )등이 있다. 슬래커록은 그 자체로도 좋은 재료가 되지만, 해당 장르가 시작되던 초창기 이후에는 아티스트 각자의 스타일로 재해석되곤 했다. 노이즈록/팝이나 슬로우-글룸 코어[1], 어쿠스틱 음악에 접목되기도 하며, 스타일은 천차만별이지만 우울하고 로파이한 분위기는 슬래커록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90년대 초창기부터, 이후 여러 갈래로 발전된 형태의 앨범들을 살펴보며 올봄을 함께할 음악을 발굴해 보자.


Pavement – [Crooked Rain, Crooked Rain]

슬래커록의 선두 주자, 캘리포니아 인디밴드 페이브먼트의 정규 2집이다. 90년대 칼리지 록밴드 R.E.M.과 포스트펑크 밴드 에코 앤 더 버니멘(Echo&the Bunnymen)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보컬 스티븐 모크머스(Stephen Malkmus)의 어리둥절하고 느긋한 페르소나를 중심으로 펑크 정신을 재구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 리드를 연상시키는 건성건성한 보컬, 밴드 신과 사회현상을 비꼬는 냉소적인 가사, 의도적으로 불협을 내는 듯한 기타까지. [Crooked Rain, Crooked Rain]은 과연 완벽한 슬래커 스타일의 음반이라고 볼 수 있다.

느긋한 6/8박자의 드럼을 기반으로, 곡의 절반 이상이 자유분방한 멜로디의 기타와 강렬한 베이스 코드 연주로 채워진 “Stop Breathin”에서는 그들의 실험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데이브 브루백(Dave Brubeck)의 “Take Five”를 페이브먼트만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로파이한 록으로 풀어낸 “5 – 4 = Unity ”, “난 정돈된 삶을 원해( I want a range life)”라는 가사의 반복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인 “Range Life”에서는 밴드 스매싱 펌킨스와의 투어를 회상하며 이들을 디스하는 듯한 가사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페이브먼트를 대중에게 알려준 곡 “Cut Your Hair”에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 일은, 절대 통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음악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라고 말하며 밴드들에 대한 솔직한 속내들 드러내기도.

페이브먼트 특유의 빈티지하면서도 미완성적인 투박한 매력이 있는 이 앨범은 잠에서 깨기 싫은 기분 좋은 오후, 따듯한 햇살이 이불속으로 숭숭 들어오는 기분을 느끼기에 단연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Duster – [Stratosphere]

따듯하고도 부드럽게 뭉개진 드럼과 기타, 나지막이 들리는 보컬. 몽롱한 아늑함이 가득 들어있는 더스터(Duster)의 [Stratosphere]. 98년도 발매 당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2010년대 들어서 디스코그(Discog)와 같은 인터넷 음악 평론 사이트를 기반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고, 이후 앨범의 수록곡인 “Inside Out”, “Constellations”가 틱톡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현재까지 많은 리스너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홈 스튜디오에서 값싼 아날로그 장비들로 음악을 만든 덕에 더스타만의 몽롱하고 따뜻한 아날로그 사운드로 완성된 그들의 사운드는 슬로우 코어, 슈게이즈, 스페이스록, 슬래커록 등 다양한 하위 장르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최애 밴드의 최애 밴드’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여러 질감의 기타가 더해지며 인트로부터 기대감을 자아내는 “Echo, Bravo”는 우주에서 둥둥 떠다니는듯한 묘한 기분을 선사한다. “Earth Moon Transit”에서는 2분이 넘는 독특한 인트로를 지나 보컬이 등장하며, “The Landing(착륙)”이라는 제목의 6번 트랙은 마치 오랜 우주비행을 마치고 지구에 돌아온 뒤 공허함과 허무함을 느끼는 우주비행사의 심정을 표현한 듯하다.

‘대기권’이라는 제목 아래, 지구와 달, 우주를 연상케 하는 우주적인 분위기의 곡들로 가득 채워진 이 앨범은 이른 아침 선선한 봄날씨를 즐기며 산책하기 제격이다. 다만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의 몽롱함이 당신을 다시 잠들게 할 수 있으니 주의하자.


Grandaddy – [The Sophtware Slump]

못다 핀 꽃을 보듯, 그들의 음악은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겠다. 시네마틱한 사운드 이펙트, 공간감이 느껴지는 입체적인 믹스는 이 감정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만들어준다. 미국의 인디록 밴드 그랜대디(Grandaddy)의 두 번째 EP [The Sophtware Slump]는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0년도 피치포크 올해의 앨범 6위에 선정되며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은 앨범이다.

앨범의 제목은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Slump)’에서 착안했다. 실제 그랜대디의 1집이 좋은 반응을 얻은 후 나온 2집이라 그런지, 땅이 꺼질듯한 우울감과 절망적 분위기가 더욱 생생히 느껴진다.

예상치 못한 전개가 돋보이는 “He’s Simple, He’s Dumb, He’s The Pilot”, 파도처럼 몰아치는 감정기복을 표현한 듯한 “Broken Household Appliance National Forest”. “The Crystal Lake”에서는 잊고 싶었던 기억을 다시 우연히 마주했을 때의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거친 디스토션의 기타와 빠른 리듬의 반복적인 신디사이저는 기억 조작을 일으킬 만큼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꽃가루가 흩날리는 기분 좋은 날씨에 지독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향수의 먼지가 가득 쌓인 그들의 앨범을 들어보자. 그랜대디가 당신의 마음 한 구석에 새로운 향수를 만들어줄지도.


Alex G – [Race]

“전문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것은, 그냥 하기 싫다. 언젠가는 해야 할 것 같지만.”

2010년 발매된 알렉스 지(Alex G)의 1집 [Race]는 홈레코딩을 추구한 덕에 러프하고 정제되지 않은 매력이 가미되어 있다.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의 영향을 받았다는 그의 음악은 어쿠스틱 기타를 이용한 포크 음악을 기반으로, 장난스럽고 감성적인 가사를 툭 뱉어내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감성을 드러낸다.

“제발 날 도와주지 마”라고 말하며 시골풍의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첫 번째 트랙 “Remember”부터, 마치 녹음 현장에 함께하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3번 트랙 “TV”, 보컬과 실로폰의 멜로디가 함께 산책하는 듯 뒤섞이며 코지한 분위기를 내뿜는 “Trash”, 내 안의 숨겨진 너드미를 꿈틀거리게 해줄 “Crab”까지. 어눌한 더블링과 살짝 엇나간 듯한 리듬은 알렉스 지의 엉뚱하고 솔직한 매력을 극대화시켜 준다.

가볍고 살랑살랑한 리듬 위에 로파이하게 어우러지는 기타와 보컬, 길게 늘어뜨리며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중독적인 이 앨범은 낮잠을 세 시간씩 자버려도,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태연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을 때 제격이다.


Weatherday – [Come In]

마지막으로 소개할 웨더데이(Weatherday)의 [Come In] 은 지금까지 소개했던 다른 슬래커록들처럼 여유로운 분위기는 아니지만, 강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듣기에 무엇보다 좋을 앨범이다. 특히, 귀를 가격하는 반항적 사운드의 향연. 슬레이커록을 노이즈, 이모(Emo)와 함께 접목한 이 앨범은 마치 꼬마 광인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만 같다. ‘Sputnik’라는 이름의 스웨덴 출신 1인밴드 아티스트인 그는 2018년 첫 EP를 발매, 2집 [Come In]으로 현재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참고로 슈게이즈 1인밴드로 잘 알려진 파란노을도 이 앨범에 영향을 받았다고. 웨더데이는 ‘Lola’s Pocket PC’, ‘Five Pebbles’ 다양한 이름으로도 활동하며, 주로 이모와 노이즈록, 슈게이즈, 신스팝을 이용한 음악을 만들고 있다.

다른 슬래커록들과 비슷하게 곡들의 대부분이 그의 침실에서 녹음되었으며, 불안과 나약함, 괴로움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Come In”, “Older Than Before”에서는 화려한 기타리프, 폭발적인 인트로와 빠른 템포, 가슴을 파고드는 거친 질감의 기타와 드럼이 주는 강렬한 에너지와는 상반되게 어딘가 우울하면서 슬프기도 하다. 장난스럽고도 애절한 절규가 돋보이는 “Mio, Min, Mio”에서는 마지 네 트랙을 합친 것 같은 급진적인 곡의 구조가 독특하면서도 인상적이다.

내면의 불안과 혼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앨범은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와 함께 은근한 친밀감을 형성하며, 무기력한 하루를 함께 보내기에 충분하다.


필자가 생각하는 슬래커록의 가장 큰 매력은 있는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보통의 정식 발매된 음원이 최대한 깔끔하고 듣기 좋게 다듬어진 반면, 슬래커록 음악은 이와는 정반대 성향을 띠는 곡들이 많다. 재생되던 악기의 멜로디가 툭 끊기기도 하고, 중간에 뜬금없이 다른 음악이 삐져나오기도 하고, 갑자기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는 듯한 착각을 주는가 하면, 녹음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 그대로를 러프하게 담기도 한다. 슬래커록은 마치 조미료 같기도 하다. 보통의 하위 장르가 그렇듯, 다른 장르와 자연스레 섞여 음악을 더 특색 있고 완성도 있게 끌어다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년 똑같이 반복되는 봄. 늘어지는 날씨에 색다름 이끌림을 원한다면, 슬래커록은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 틀림없다.

[1] 안개가 낀 숲속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곡들을 나타내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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