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ght It / 2024. Nov

유난히 길게 느껴진 여름, 그 뒤로 가을이 슬쩍 고개를 들이미는가 했더니 금세 공기가 제법 차다. 변덕스러운 기온 만큼  행인의 옷차림도 제각각이다. 꽉 여민 코트부터 다운 재킷, 믿기 어렵겠지만, 오늘 출근길에는 반소매 티셔츠만 입은 사람도 목격했다. 음미할 새도 없이 지나가 버린 가을 탓에 마음이 헛헛하다. 이런 휑한 마음을 가장 쉽게 채울 방법은 역시나 쇼핑일 테다. VISLA 필진의 소비 행태를 알아보는 인기 코너 ‘Bought It’이 긴 휴식기를 지나 다시금 부활했다. 스리슬쩍 새로운 시작을 알려 본다.


오욱석 – NO ROLL: OUTDATED CAP

이건 겨울 모자다. 누군가는 패션에 계절이 어디 있느냐고, 코듀로이 소재 좀 썼다고, 멋대로 ‘겨울’이라는 수식을 붙이느냐 말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겨울 모자로 통한다. 이 패션의 계절 공식은 아내로부터 시작된 모호한 격식이다. 그 발단은 이렇다. 몇 년 전 여름, 신발장에서 스웨이드 소재의 신발을 꺼내는 나를 보고는 아내가 이렇게 더운 날 왜 ‘겨울 신발’을 꺼내느냐 묻더라. 일평생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스스로 생각해 본 일도 없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겨울 신발이 있다는 건, 여름 신발도 따로 있는 것일까?’, ‘계절 스타일링의 범위는 어디까지 적용되는 걸까?’ 등등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종합해 신발을 예로 계절템을 구분해 보자면, 메쉬나 캔버스 소재의 가벼운 러닝화, 스니커는 여름 신발, 스웨이드나 두꺼운 가죽 소재로 제작된 신발을 겨울 신발로 구분 짓는 것 같다. 이는 모자에도 적용되어 메쉬캡은 여름에, 코듀로이 캡은 겨울에 쓰는 식이다. 어쩌면 패션 브랜드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요즘은 종종 나도 모르게 그 공식을 따른다.

아무튼, 성큼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겨울 모자를 하나 샀다. 올여름 정말 잘 쓴 노롤(NOROLL)의 모자다. 계절에 맞춰 시원한 린넨 소재의 여름 모자를 샀으니, 이번에는 코듀로이 소재의 겨울 모자를 쓸 차례다. 코듀로이 소재, 크림과 아이보리 그 언저리의 애매한 컬러감, 그리고 후면의 사이즈 조절 벨트가 어린아이처럼 귀엽다. 무엇보다 추운 날씨 자신 있게 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내부의 탭에는 친절하게도 ‘THANK YOU FOR WEARING’이라고 적혀 있다. 천만의 말씀. 누가 뭐라 해도 이건 겨울 모자다. 여러분의 생각은?

진우 아무튼 옷 엄청 사.
선웅 진짜로 따뜻한가요?
혁인 그래서 겨울 모자인지 여름 모자인지 모르겠는 모자 어떤데…
재혁 NOROLL&NORULE…

장재혁 –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

연말에는 자고로 떠나야 하는 법이라 생각했지만 이번 겨울은 참아보기로 한다. 사실 여행이라는 게 아무리 휴가라 해도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 정신과 몸의 강행군 아니겠나. 언젠가 서울에서의 휴가를 그저 동네 밥집에서 혼자 말없이 끼니를 때우고 소파에서 과자도 까먹으며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나니, 웬걸 이게 진짜 쉬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쉴 수는 없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 쉼을 실행할 수 있는 차분한 성격은 아닌지라 뭐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방구석에서 할 몇 안 되는 것 중 단연 짜릿한 건 닌텐도다. 곧 다가올 지옥 같은 혹한기에는 더욱더. 그래서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을 샀다. 혹자는 왜 최신작 “지혜의 투영”을 사지 않았느냐 하겠지만 사실 두 버전의 후기가 극명하게 갈리는지라 자연히 “꿈꾸는 섬”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야생의 숨결”, “왕국의 눈물”을 연달아 플레이하며 젤다 시리즈의 팬이 되었지만 초고퀄리티 오픈월드 게임만 하다 보니 역시 미니미한 예스러운 게임이 생각나는 것 아니겠나.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 어쩌면 왠지 손길이 가지 않던 “왕국의 눈물”에 큰 실망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플레이 횟수가 단 1회이기에 자세한 후기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시작한 지 10분 만에 난관에 봉착해 우왕좌왕고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스크린에서 첫 플레이 화면이 밝아올 때 다시 엄청난 모험을 시작한다는 희열이 느껴졌다. 요상한 비율로 찌그러진 링크를 조작하며 마주하는 앙증맞은 캐릭터들은 맵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기분을 퍽 좋게 한다. 과연 이번 겨울에는 어떤 여정을 링크와 보내게 될지… 옛 게임보이 시절의 버전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하니 기대감이 더해진다. 게임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꿈꾸는 섬” 버전의 링크 아미보가 사고 싶어져 얼른 가봐야겠다. 이만 퇴장…

욱석 저는 요즘 용과 같이: 극 스위치판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것도 꼭.
진우 젤다 말고 다른 것도 좀 해봐요
선웅 왕국의 눈물 젤다를 구해주긴 한 거죠?
혁인 젤다 1번 하고 쓰는 기분 어떤데…

황선웅 – Metal Gear Solid: The Vinyl Collection

돌아온 ‘Bought It’. 이전 ‘Bought It’ 시리즈는 나에게 이달 구매한 바이닐 레코드를 소개하는 장이었다. 당연하게도 옷이나 책 등도 소비했지만, 바이닐만큼이나 매달 꾸준했던 사치품은 없었기에, 또 바이닐만큼은 할 이야기도 많았기에 바이닐만 소개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시리즈도 어김이 없을 테다. 계속 내 지갑을 털어간 바이닐만 소개할 거다. 일관성 있게. 꾸준히.

최근 소비한 바이닐 레코드는 위대한 게임 시리즈 “메탈 기어 솔리드(Metal Gear Solid)”의 사운드트랙을 갈무리한 6장의 박스셋이다. 블록버스터 게임 음악을 레코드에 담아온 ‘레이스드 레코드(Laced Records)’에서 제작한 볼륨감있는 패키지. ‘몬도(Mondo)’를 비롯해 언오피셜의 부틀렉까지, 지금껏 다양한 업체가 게임 “메탈 기어 솔리드”의 음악을 다뤄왔지만, 이처럼 거대한 볼륨으로 제작, 유통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 의미가 깊다.

사실 난 “메탈 기어 솔리드”를 플레이해 본 적이 없으므로 OST를 듣고도 음악에 공감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메탈 기어 솔리드”는 수많은 팬을 거느린 게임 시리즈고, 또 비디오 게임 레코드 대부분은 발매 당시의 가격이 가장 저렴하므로 일단은 구매했다. 나중에 음악이 좋아질 수도 있고, 음악에 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 레코드를 원하는 이와 트레이드도 가능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미 두 배가 넘는 가격에 중고 거래가 이뤄지는 중이라 본전은 쳤다. 사실 보사노바 곡 “Sea Breeze”를 비롯해 게임 곳곳에 릴렉싱한 곡들의 존재를 알고 이를 기대하긴 했으나, 아쉽게도 이번 박스셋에는 내 취향의 릴렉싱한 사운드트랙은 담기지 않았고 대부분 긴박하거나 웅장하다.

욱석 잠입 액션이라면 보통 긴박하거나 웅장한 사운드겠지…
진우 사실상 바웃잇 코너 속의 코너 선웅이의 판 자랑.
혁인 게임을 안 하고 게임 음악을 듣는 기분은 어떤데…
재혁 바이닐 투기에 관해 공부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권혁인 – Young, Sleek and Full of Hell: Ten Years of New Alleged Gallery

사춘기 무렵부터 내 삶의 영역은 문화적인 결핍을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구체적인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 MTV와 PC 통신을 통해 접했던 힙합 음악. WWW를 타고 경기도까지 흘러들어온 90-00년대 뉴욕의 길거리 문화. 전자음악 그리고 DJ 컬처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파이오니어들. 미래가 갑갑하고 불투명했던 또 하나의 청춘에도 일말의 싹수가 보였던 건 아무래도 그쪽 문화를 향한 열망이 컸던 덕택이 아닐까 한다. 내가 사는 지역의 언어와 정서로 동경하는 문화의 장에 몸을 담아보려던 호기심이 제법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바뀔 때가 되니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옆에는 제법 뜻이 맞는 동료들과 작지만 그래도 땀 흘려서 키운 터전이 생겼다.

아마도 30년 전쯤, 나보다 먼저 이 문화에 강렬한 열망을 느낀 뉴욕의 아티스트와 창작자들은 기성 문화와 예술 체계에 결핍을 느낀 나머지 자신들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뉴욕에서 약 10년간 그 명맥을 이어갔던 갤러리 Alleged. 지금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라면 매료될 만한 이름들, 마크 곤잘레스, 배리 맥기 등 무수한 아티스트가 이곳을 드나들며 교류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시대의 문화가 낳은 유산은 실로 다채롭고 거대한 스노우 볼이 되어 지금 세대에게까지 유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1년째 이어가는 VISLA를 통해 다시 어렵게, 한 걸음씩 또 새로운 놀이터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나는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결핍되어 있고, 더 많은 놀잇감을 꿈꾸는 중이다. 세상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더욱더 악몽처럼 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기적인 욕망과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나만의 투쟁 영역을 넓혀보려 한다. 단칸방에서, 지하실에서, 여기저기 기억도 안 날 포장마차와 길바닥에 앉아 친구들과 뒤엉켜 꿨던 꿈이 여전히 이뤄질 거라 믿으면서.

욱석 ‘Bought It’에서 가장 책 소개를 많이 하는 사람. 저도 보고 싶으니 
나중에 대여 부탁합니다.
진우 문화 빼고 뭐 좀 사보시는 건 어떨까요.
선웅 새로운 놀이터는 어떤 건데…
재혁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그의 사춘기… 

박진우 – New Balance 996 Made in USA Grey

약 7~8년 전?, 운 좋게 12만 원에 뉴발란스 996 USA를 구입한 적이 있다. 이 신발은 단순히 편안함 그 이상이었다. 신고 벗기도 편하며, 걷기, 뛰기 모두 편안했다. 모양마저 편안. 말 그대로 내 신발 중 디폴트값, 신발 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았다. 너무 많이 신은 탓에 세탁으로도 되살릴 수 없는 컨디션이 되어버렸다. 하나 더 사 말아 하던 시점에 가게 된 일본 여행 중 뉴발란스 매장에서 996을 다시 만났다. 예전에는 미국에서만 생산되던 996이 이제는 다른 국가에서도 생산되어 10만 원 정도로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었다. 그중 한국에는 없는 보라색 모델이 눈에 들어와 구매했는데, 너무 잘 신고 있긴 하지만 Made in USA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속 깊은 곳 어딘가에 움츠린 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두 신발을 꺼내 비교해 봤다. 차이가 분명했다. 소재, 박음질, 전체적인 만듦새가 메이드 인 USA가 확실히 돈값을 하더라고. 결국 나는 996 USA를 최대한 사는 쪽으로 마음먹었다(막 3~40만 원 이러면 못 사고, 20만 원 언저리면 고민해 보자 정도의 느낌). 알아보니, 크림에서 USA 996이 약 18만 원에 판매 중이었다. 일본 매장에서 봤던 가격이 27~30만 원대였으니, 이건 사실상 심리적으로 거저인 느낌. 크림에 짝퉁 논란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용기 내어 구매했다.

급하게 외출 시 무슨 신발을 신을지 순간적으로 고민될 때, 나도 모르게 내 발에 꽂혀있는 그런 신발. 걷다 보면 발인지 신발인지 모를 신발, 내 신발계의 디폴트값, 뉴발란스 996. 외계인이 나에게 지구인은 운동화라는 걸 신는다던데 샘플로 한 개만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면 보낼 법한 그런 느낌. 옷이나 신발로 개성을 연출(?)하는 타입이라면 너무 무난한 모양새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말 좋은 신발이라고 생각한다.

욱석 정확한 차이를 알고 싶으니 996 CM 사양과 Made in USA 사양으로 
한 쪽씩 착용 후 출근해 주세요.
혁인 뉴발란스 993은 어떤데..
선웅 996이 너무 편하다고 신발 신고 방을 헤집고 다니면 안 되어요.
재혁 저와는 정반대의 타입이지만 존중합니다.

Editor│오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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