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및 하드웨어 내장 칩에서 발견한 예술, ‘Chip Graffiti’

워런 로비넷(Warren Robinett)의 크레딧이 표기된 어드벤처(Adventure)의 비밀 방

게임 개발자가 자신이 개발한 게임, 또는 소프트웨어에 숨겨놓은 메시지나 기능인 이스터 에그(Easter Egg). 이는 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게임의 숨겨진 재미를 찾는다는 면에서 플레이어에게 탐구열과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 게임 산업 내에서 암암리에 이뤄지던 이 설계는 1980년 게임회사 아타리(Atari)의 개발자 워런 로비넷(Warren Robinett)이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게임에 대한 정당한 크레딧이나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느껴, 게임 특정 부분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타나도록 몰래 설계한 것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정식 명칭을 얻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반도체 하드웨어 및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영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오늘 소개할 칩 그래피티(Chip Graffiti)━또는 칩 아트━ 역시 개발자, 및 디자이너의 비밀스러운 장난이 문화적 주류로 전파된 이후,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에 활발히 이뤄진 이스터 에그의 일환이다. 칩의 직접 회로에 새겨진 미세한 아트워크를 말하는 칩 그래피티는 아주 작은 사이즈로 구현되기 때문에 현미경 없이는 발견하기 힘든 수치. 게다가 제작자에게는 이에 대한 자유도와 독점권이 부여되어 그들은 기능적으로 마찰이 없는 빈 공간을 활용해 단순 이니셜부터 복잡한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아트워크를 삽입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집적 회로는 실리콘, 유리, 알루미늄과 같은 여러 층의 재료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재료가 겹겹이 쌓여 두께를 형성하면 독특한 색상을 구현한다.

회로의 이러한 특성을 활용해 입체적인 선과 독특한 색상으로 완성된 작업자들의 아트워크는 일부 연구가들에 의해 서적 ‘On the Surface of Things’으로 출판되는가 하면, 실리콘 주(Silicon Zoo)를 비롯한 학계 권위자의 온라인 아카이브에 수집되어 계속해서 수집의 가치가 조명받고 있다 ━ 최근에는 앙투안 베르코비치(Antoine Bercovici)의 트위터 계정과 캔톤(Kenton)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이를 꾸준히 수집 중인 것으로 보인다. ━ 상단 이미지 슬라이드에 첨부한 ‘AD1939’ 코덱 칩 내부의 랜드 샤크(Land Shark) 캐릭터, 달라스 세미컨덕터 (Dallas Semiconductor ) 테스트 웨이퍼에 새겨진 호랑이, 닌텐도 게임큐브(Nintendo GameCube) 콘솔의 돌고래, 컴퓨터 프로세서 ‘MIPS R4000’에 새겨진 월리(wally), HP(Hewlett-Packard)의 토르(Thor) 등이 그중 잘 알려진 칩 그래피티 사례. 그 외에도 구글에 ‘Chip Art’를 검색하면 무수히 많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1996년 ‘Silicon Graphics MIPS R10000’ 마이크로 프로세서에 새겨진 이미지, 엔지니어 역-하이 샤크 목(Yeuk-Hai Shark Mok)이 자신의 아내 엘런(Ellen)과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삽입했다.

모두가 예상한 결과겠지만, 오늘날 상업용 칩을 대량 생산하는 대부분의 반도체 회사는 칩 내부에 이러한 아트워크를 삽입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 흐름이 잦아들기 시작한 기점은 1984년 반도체 칩 보호법(Semiconductor Chip Protection Act)의 도입된 이후로부터.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있던 업체들은 경쟁업체가 유사한 칩을 복제할 시 숨겨둔 아트워크까지 복사된 것을 통해 저작권 위반을 식별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제지를 가하지 않았으나, 모든 칩 마스크가 자동으로 저작권 보호를 받게 되면서 그 용도가 희미해지고야 말았다. 그러다 보니 이는 특별한 명분이 없는 관습이 되었고, 분명 기능상 영향을 끼치지 않는 영역 내에서의 작업이지만 일부 작업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하락세가 과연 정확한 지표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다. 상단 이미지의 사례와 같이 90년대 중후반까지도 개인사를 기념하기 위한 일에 마저 칩 아트의 생산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시 한번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칩 그래피티와 이스터 에그의 개념이 동일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스터 에그의 존재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것처럼, 동시에 지금 이 시간에도 개발자 및 디자이너가 상품 출시의 이면에서 메시지를 숨겨 놓는 행위를 지속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행여 끝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소수만이 아는 은밀한 장난으로 시작해 10여 년간 지속된 칩 그래피티는 거리를 수놓은 그래피티와는 사뭇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를 넘어 초기 디지털 시대에 당도한 시점, 발견의 재미와 시각적 쾌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칩 그래피티의 세계를 탐험해봄은 어떨까.


이미지 출처 | Silicon Zoo,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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