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유난히 짧았고 무더위도 딱히 없었다. 어느덧 짧아진 해에는 희미했던 여름의 여운이 진하게 묻어있는 듯하다. 두어 달 후에 한 살을 더 먹게 된다고 생각하면 더 끈질기게 여름의 여운을 붙잡아야 할 것 같은 조급함도 생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지긋지긋한 2020년을 떠나보내고 싶겠지. 희망찬 2021년이 보장되어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불행한 사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우리는 완연한 각자의 삶을 단단히, 즐겁게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10월 영감은 퍼즈(FUZZ)의 디렉터 심경식, 케일(CAYL)의 디렉터 이의재가 글을 보탰다.
김홍식 – 장석종과 크래커 매거진
아마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껏 멋 부린 친구와 한여름 무더위를 뚫고 가로수길을 찾았더랬다. 그날 우리의 옷차림까지 떠오를 정도로 선명한 기억. 나는 당시 무신사 커뮤니티 좀 본다는 멋쟁이들의 필수템인 ‘닥터마틴 3홀’을 신고 있었고, 친구는 붉은색 반스 하프 캡에 코데즈 컴바인 데님 팬츠 차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할 정도로 어쭙잖은 차림새였지만, 우리의 각오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날은 당시 이 동네 스지란 스지는 모조리 모이는 피프티 서울(FIFTY SEOUL)에 처음 방문하는 날이었으니까.
피프티 서울의 주최자 중 한 명인 장석종 편집장은 나에게 둘도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는 항상 크래커 매거진 과월호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언제라도 할 것 없을 때 아무 페이지나 툭 펼쳐놓고 읽었던 내용을 또 읽는 식이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 그 어딘가의 냄새를 풍기는 크래커 특유의 기획에 매료됐던 것 같다. 인터뷰이의 집에 찾아가서 옷장에 있는 옷을 죄다 바닥에 깔아놓고 인터뷰한다니. 진행하는 에디터 입장에서는 생각만 해도 진땀 나는 기획이지만, 독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리얼할 수가 없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반복 학습은 결국 패션 매거진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을 만들어냈고, 그 환상 속에서 편집장과 에디터는 내게 스타들이었다. 결과론적인 해석이지만, 그 당시 크래커의 영향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 그렇기 때문에 얼마 전 유튜브 피드를 둘러보다가 장석종 (구)편집장의 채널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회는 남달랐다. 요즘 중고등 학생들은 마인크래프트 영상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는데, 나한테는 장석종 채널이 딱 그런 역할인 셈이다. 영상을 보고 그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신대륙을 발견한 것 마냥 심장 떨리던 내 모습이 떠오르니 말이다.
장석종 채널을 구독한 이후 그때 그 시절 유명했던 브랜드, 혹은 제품을 검색해보는 것이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그 당시에도 이걸 왜 사지 싶었던 나이키 SB 유진 버즈라이트 백팩은 지금도 번개장터에서 30만 원에 팔리고 있고, 코데즈 컴바인은 이제 패션 브랜드보다 2016년 코스닥 최고의 작전주로 더 유명한 모양이더라. 뜻밖의 격세지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패션과 매거진에 대한 어린 시절의 순수한 열정을 떠올리게 하는 기분 좋은 자극이다. 식어가는 엔진에 열기를 더하는 장석종 채널과 크래커의 기억이 요즘 나에게는 최고의 영감이다.
심경식 – 책임감
나는 유년시절 친구들과 아무 생각 없이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는 장난꾸러기였다. 철없던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생각보다 많이 점잖아졌다. 과거와 비교해 보면 나는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해서 가끔은 머리가 아프다. 2016년에 자신감 하나로 퍼즈를 시작한 때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겐 냉정한 사회는 너무 큰 모험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두통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책임감이라는 것이 생기고 나서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듯하다.
또한 갑자기 글을 쓸 생각 없냐고 진우 형이 물어봤을 때 거절했더라면, 이런 경험이 있었을까. 흔쾌히 쓰겠다고 한 그 선택 또한 책임감이지. 요즘 들어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지고 책임져야 할 상황이 많아지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보았다.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임감이라는 것은 참 부담스럽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두통은 꾀병일지도 모른다.
최장민 – 비디오 콘솔 게임의 역사
최근 들어 비디오 게임에 관심이 많아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비디오 게임 산업과 역사 쪽이다. 초등학교 시절 겜돌이였던 나는 20대가 되면서부터 급격하게 비디오 게임과 멀어졌고 플레이스테이션 2 시대 이후로는 콘솔 기계를 구입한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약 10년 동안 비디오 게임계로부터 떨어져 지냈는데 요즘 유튜브를 통해 비디오 게임 산업 관련 콘텐츠를 보며 그동안 놓쳐온 정보들을 다시 습득하는 중이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된 뉴스는 소니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차세대 게임기 전쟁일 것이다. 현재 양사는 플스 5, 엑스박스 X라는 기기의 판매를 목전에 둔 채 플스2, 엑스박스 때부터 시작된 전쟁을 다시 이어나가려고 하고 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현재 유튜브의 다양한 게임 채널에서는 이 두 회사의 전쟁의 역사에 관련된 콘텐츠들을 쏟아내고 있고 좀 더 과거로 돌아가서 예전의 8비트, 16비트 시절의 양강 체제를 구축한 닌텐도와 세가의 콘텐츠도 보여주고 있다. 기기의 기술력과 활용성, 콘솔 제작사와 게임 제작사간의 줄다리기, 게임 제작사의 놀라운 상상력으로부터 탄생한 게임 소프트, 브랜드를 쿨하게 선보이는 마케팅 등 오랜 역사가 쌓인 비디오 게임 업계의 이야기만으로도 마치 비디오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재미를 느끼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특히나 비디오 게임 개발사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는 걸 좋아한다. 16비트 게임기와 소닉의 탄생 배경, RPG 게임의 진화, 1인칭 슈팅게임의 진화 등 지금은 널리 익숙해진 것들을 처음 만들어낸 혁신의 뒷이야기를 보는 일은 너무나도 즐겁다. 시대에 맞춰 찬란하게 진화하는 비디오 게임 산업이 어느 레벨까지 다다를지 또 어떤 새로운 콘텐츠가 나올지 진심으로 기대된다. 오는 11월, 다시 시작될 새로운 비디오 게임의 시대를 지켜보도록 하자.
이의재 – 산
새벽의 산, 화창한 날의 산 그리고 어둠이 깔리는 산은 각기 다가오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화창한 날씨의 깨끗한 하늘이 보여주는 청량감과 자연에서 오는 감동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지만,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어두워지고 무섭다면 한없이 무서워질 수 있는 곳이 산이다. 히말라야가 아닌 한국의 산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렇다. 다만 이런 경험이 모여 익숙해지는 시간이 지나면 좀 더 편하고 덤덤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 같다. 특정한 사건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감정의 기복이나 불안의 컨트롤이 그것이다.
새벽에 산을 걷고 있으면 해가 뜨기를 기다리게 된다. 밝아오기 시작할 때의 달달한 안도감이 우리 삶과 닮은 것 같다. 기분 좋은 날이 많고 그 기분의 자극이 높아질수록 그 반대의 그 감정도 깊어질 수 있다.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순간이 있듯이, 좋은 기분과 나쁜 기분의 오르내림에 적응하고 이를 덤덤히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에디터 │ 박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