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코로나│2020년 6월호

2006년, 군입대할 때 인생 처음으로 느낀 감정을 최근 코로나로 다시 한번 느꼈다. 그 감정은 무력감이다. 뭔가 하고 싶다거나 하기 싫을 때 우리는 어지간하면 선택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선택지라도 보통은 주어진다. 하지만 군 입대와 코로나는 개인적인 선택지가 없다. 불법적인 행동이 아닌 거 같지만, 난 안갈랭ㅋ이라든지 마스크 쓰기 시렁ㅋ은 통하지 않는다. 코로나는 지금 유행의 차원을 넘어섰다. 찡찡댄다고 봐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 코로나 지겹지도 않냐, 그만 좀 떠들라고 할 수 없는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 우리는 생각이 많아졌다. 이번 월간 영감은 코로나 특집이다. 코로나라는 새로운 환경은 친구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했나. 이번 월간 코로나는 DJ 어비스(ABYSS), 스케이트보드 필르머 황지석이 함께했다.


말이 / 황지석

미래가 빨리 와버렸다. 2020이라는 미래적이고 상징적인 숫자에 어울리듯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그 이유인데 다행히도 내 주변에는 사상자가 없이 잘 대처하고 있어 난 편안하게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 가장 핵심 키워드는 격리라고 생각한다. 난 ‘quarantine’이라는 영단어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Quavo의 신곡인 줄 암…). 난 원래 집돌이이며 가끔씩 자가 격리를 즐겨하기에 현 상황이 크게 답답하지는 않다. 얼마 전 유튜브 영화 요약 채널에서 본(요새는 맘이 급해서 이런 요약 프로그램 보는 걸 즐긴다) “빠삐용”이 생각나는데 격리가 아닌 수감이지만 고통의 끝을 보여준다. 비교하기에는 비약적이지만 30년 전 인터넷이라는 게 없었던 시절이라면 격리는 말 그대로 졸라 힘든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인터넷만이 내 격리 생활의 원동력은 아니다. 난 2년 전부터 강아지를 키우는데 이름은 ‘말이’다. 살면서 처음 뭔가를 키우는 거라 서투르고 탈도 많지만 이제는 나에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내가 좀 더 집에 많이 있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개를 키우면서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도심에서 개를 키우는 일은 어느 정도 학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넓은 집이라도 바깥 세상보다 나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도심의 모든 개들은 365일 격리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선을 다해서 산책을 시키고는 있지만 말이를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 같다. 하루 중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말이의 기분을 이해하면서 다시 자유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해본다.


The Midnight Godspel / Abyss

자면서 가끔 넷플릭스 콘텐츠 하나를 틀어놓는다. 잘 때는 마음이 평화로워야 하니 귀엽거나 순한 그림 애니메이션으로 아무거나 고른다. 문득 같은 팀 멤버가 추천을 해준 애니메이션이 생각나 그걸로 틀었는데 그게 ‘미드나잇 가스펠(The Midnight Gospel)’이다. 몽롱한 상태로 보다가 예상을 벗어난 내용에 호기심이 생겨 다음화까지 봐버렸다. 내용은 주인공 ‘클랜시’가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중고로 산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가상 행성에서 만난 존재와 인터뷰를 하며 우주로 팟캐스트를 발신한다는 스토리다.

클랜시가 가상 행성을 방문하면 온갖 상황에 놓이며 내용이 전개되지만 정작 대화는 종교, 존재, 죽음, 철학 등의 모두가 체험할 법한데 신비의 영역에 걸쳐 있어서 현실에서는 불행히도 잘 거론되지 않는, 거의 최신 논의에 관한 내용이다. 각 화의 내용에 어느 정도 맥락을 맞추고는 있지만 산만한 스토리를 쫓아가면 대화들을 놓치고, 심오한 자막을 읽고 있으면 스토리를 놓치게 돼서 1화가 끝나기도 전에 혼란스러운 기분이 든다(영어 네이티브가 아니면 더욱 심하다).

사실 이 애니는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팟캐스트 실제 진행자인 덩컨 트러셀이 주인공역을 맡은, 모든 에피소드가 덩컨 트러셀이 실제 운영하는 팟캐스트에서 게스트들과 나눴던 내용을 애니메이션화한 것이다. ‘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의 제작자 팬들턴 워드가 이 팟캐스트를 듣다가 흥미가 생겨 함께 하자고 했다고. 제작자는 애니의 주인공을 통해 전 화에 걸쳐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마지막 8화에서는 정리된 결론과 함께 감동이 있다. 덩컨 트러셀의 어머니와의 대화로 이루어진 에피소드로, 정말 중요한 것과 진짜 아픔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용기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평화로우면서 슬프다. 인간의 삶에는 도저히 혼자 감당이 될 것 같지 않는 아픔이 존재하고, 감당을 하려면 마음에 틈을 내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가장 두렵고 피하고 싶은 거라 회피하기도 하고 한 눈도 팔아보고 쿨한 척도 해보지만 아무 소용없다. 그러는 사이 죽음이 너무 빨리 찾아온다. 그리고 사실은 무시무시하다고 느껴지는 죽음도 어떻게 보면… 어렸을 때부터 이런 소재에 관심이 있어서 재미있게 보았다. 사람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살아가기에는 멘탈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망각하도록 되어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가능하다면 누군가와 대화해보고 싶지만 쉽게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다. 혹시 이 애니를 본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I Virused / 심은보

‘바이러스’라는 개념을 언제 처음으로 인식했는지 되짚어본다. 아마 몸으로 기억하는 건 유아기 시절 걸렸던 폐렴 따위였을 듯하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시절에 걸렸던 폐렴 때문에 삶의 첫 입원을 경험했다. 그렇지만 이 기억을 처음이라고 말하기엔 좀 부족하다. 바이러스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저 울기만 했을 테니까. 바이러스가 병을 일으키며 신체에 유해한 역할을 한다고 알게 된 계기는 책을 통해서다. 미국의 의학소설가, 로빈 쿡의 1987년 작 ‘바이러스’가 막내 이모의 책장에 꽂혀있었다. 책 속 바이러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에볼라 바이러스, 즉, 생물학 무기였다. 사람들이 죽어나는 묘사를 통해 바이러스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걸 알았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왜 바이러스라 이름이 붙었는지 알게 된 것도 이때쯤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바이러스들은 내 삶의 큰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기껏해야 의료 기록으로나마 남아있을 어릴 적의 기억이고, 10만 원으로 해결할 수 있던 컴퓨터 고장이었으며 책에서나 생물학 무기로나 등장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을 뿐이다. 그런 바이러스가 내 삶에 영향을 끼친 건 2009년, 신종플루의 유행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바이러스로 수학여행을 취소당했다.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렸다가 신종플루 양성을 받아 약 두 달간 학교를 나가지 못했다. 아프지도 않았고, 증상을 느낀 적도 없는데 양성을 받았다. 내 코 깊숙한 곳까지 면봉을 집어넣어야 했고 며칠간 집에 갇혀있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신종플루로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후, 나는 단체로 여행을 가는 일을 전혀 겪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수학여행이 없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관뒀다. 바이러스는 내 인생 마지막 친구들과의 단체 여행을 앗아갔다. 그로부터 약 11년이 지난 지금, 모두가 마스크를 쓴다.

바이러스가 모두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한 대학원생 친구는 등록금을 다 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듣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직장을 잃었다. 친한 친구는 코로나19 때문에 과외를 잘렸다. 영국, 뉴질랜드에서 일하던 친구들은 코로나19로 직장을 나가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실상 지금까지 제대로 인식한 적도 없는 어떤 존재가 세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나 또한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직장에서 코로나19에 대한 글을 검색하면 약 200개에 가까운 글이 나온다. 그중 최소 1/4은 내가 작성했다. 회사에 들어간 지 약 2달이 지나가는 지금이니, 2일에 한 개씩은 썼다. 다 같이 떠들며, 복작거리며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나갈 거란 꿈을 가지고 들어갔지만, 바이러스가 내게 남긴 선물은 재택근무였다. 나는 아직도, 모든 팀원이 모인 사무실을 본 적이 없다. 다른 모두가 느끼고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바이러스가 각자의 삶에 이만큼 영향을 끼친 적이 있는가 싶다. 그래도 바이러스는 딱 이 정도까지의 영향을 끼쳤다. 코로나19는 그저 내게 재택근무를 연장하고, 불편한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정도다.

누군가 바이러스는, 전염병은 평등하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상황을 살펴보면 아닌 것만 같다. 바이러스는 사회의 낮은 층일수록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이 글을 수정하는 지금, 쿠팡 물류센터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졌다. 당장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내 친구가 바이러스를 걱정한다. 항간에 들리는 말로는 쿠팡 물류센터에 바이러스가 퍼진 후 소득 분위가 낮은 지역구에서 재난 문자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고 한다. 바이러스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내 친구들은 클럽이 문을 닫아 일거리가 끊겼고, 세상은 나와 내 친구들을 싸잡아 깎아내린다. 첫 대규모 전파의 원인이 되었던 신천지 신봉자처럼, ‘춤천지’라는 말이 튀어나와 비난의 화살을 쏜다. 일종의 광기를 느낀다. 질병관리본부에게 더 큰 권력을 주고, 국가가 나서서 개개인의 활동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나도 쉽게 나온다. 겨우 몇 년 전, 광화문 도로에 모여 나와 함께 테러방지법, 기무사 계엄령에 관해 목소리를 높여 “이런 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없는 일이 아닌가”라고 외치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지금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내놓고, 남의 권리를 제한하라고 외치고 있다. 비난할 생각은 없다. 역사적으로 국가적 위기는 국가 권력의 강화를 불러왔다. 어쩌면 그게 모든 이의 본심일 수도 있을 테니까.

반 정도 농담 삼아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재난지원금이 화두다. 재난지원금이 얼마나 편한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국가가 지원하는 돈으로 사람들은 편의점에서 하겐다즈를 사 먹든, 고기를 사 먹든, 건강검진을 받든, 평소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한다. 사용처를 소상공인 위주로 제한한 탓에 – 물론 청담동인가 어딘가에서는 스타벅스에서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 경제도 나름 활성화가 됐다는 정보도 보인다. 글쎄. 재난지원금과 지금까지 수많은 진보정당이 이야기했던 기초 생활금과 무엇이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기초 생활금에 대해 “빨갱이의 농간이다”라고 말하던 이들도 지금 재난지원금으로 무언가를 사고 있을 거란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는 자본주의 멸망의 신호탄이 아닐까 싶다. 물론 농담이다. 유발 하라리는 지금의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협력하고 신시대를 열 것인가, 서로 불신 속에 봉쇄하고 퇴보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모두가 협력하는 신세대는 결국 우리가 그토록 울부짖던 글로벌 시대다. 모두가 협력하고,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여야 이뤄질 수 있다. 민주주의 그 이상의 어떤 이념으로, 이념 관련해 나오는 대부분의 충돌을 해결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자본주의는 무너지지만, 그보다 더 큰 걸 얻어낼 수 있다. 봉쇄하고 퇴보하는 것.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역사책에서만 보아왔다. 봉쇄는 우경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우경화는 또 다른 의미로 자본주의의 붕괴를 낳는다. 늘 그래 왔으니까. 굳이 한 가지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전자의 형태로 붕괴되길 바란다.

질병관리본부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으로는 절대 되돌아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 심각한 컴퓨터 바이러스가 걸리면 우리는 보통 컴퓨터를 포기하고 부품을 구입해 새로운 컴퓨터를 구축한다. 결국 지금의 사회도 그렇게 가고 있지 않나 싶다. 새로운 세상이 준비되어 있을 거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코로나19는 단순 바이러스가 아니게 됐다. 그러기엔 이미 사회에 많은 걸 남겼다. 비즐라 매거진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봤을 법한 미국의 스니커 사이트, 하이스노비티가 직원의 25%를 감축했다고 한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네이만 마커스가 파산 신청을 했다. 공장을 돌리지 못하니 석유가 물보다 싸진다. 코로나19가 남긴 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우리의 몫일 텐데, 글쎄. 미국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고 캐나다 어딘가에서는 마스크 쓴 동양인을 줘 패고 있다더라.


공감 / 이준용

코로나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어 전 세계적인 위협이 되기 시작한 1월, 프랑스의 한 지역 일간지에 게재된 기사가 논란이 됐다. 제목 하여 ‘Alerte Jaune’, ‘황색경보’라는 이 문구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원인 모를 전염병에 대한 수식어로 쓰인 것이다.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듯, 이는 중국발 바이러스에 중국인의 피부색을 갖다 붙인 것이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여론은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과 모욕 그리고 고정관념에 대한 반발과 대립을 조명했다. 서너 달이 지나고,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무서운 위세로 창궐해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퍼져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제는 이것이 특정 지역 혹은 소수 집단만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모두가 행복을 이야기하는 이 전 지구적 불행의 시대와 상황에서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고민하는 일은 그저 사변적인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위축되고 위기에 처해 있는 어떤 것, 매 순간 그 위기에 맞서 구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이에 대한 고민은 어떠한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식과 실천을 포함한 우리의 인간적 삶이 공감 형식을 통해 구성되고 조건 지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유사하지 않은 것에서 유사한 것을 지각하는 능력’이 근원적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등가교환의 원칙, 소유와 같은 자본주의적 개념이 개인의 삶,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타인을 마주하는 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감, 그중에서도 사랑이라는 공감의 형식을 예를 들어 생각해볼 때,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사회적 조건은 우리에게 애초에 주어져있지 않거나, 극히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어, 교환은 언제나 동등한 것의 교환이지만,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근본 원칙에 대립한다. 소유관계 또한 사랑을 그르치는데,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물로 취급하면 이 대상은 대상화되고 이로써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 타인을 공감하고 차이를 이해한다는 일 자체가 오늘날에는, 자기보존적 주체로서 자신에 대해서나 잘못된 사회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사랑을 붙잡을 힘을 가진 자, 오직 그런 자만이 사랑하는 자이다”라 말했다. 끔찍한 전염병은 오고 가는 것이지만, 인간적인 삶,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우리의 비판적 인식과 저항적 실천은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에디터│박진우

*해당 인터뷰는 지난 VISLA Paper 1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VISLA Paper는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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