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영감│2020년 7월호

혼돈의 2020. ‘ㅋ’으로 시작하는 그 단어는 언급하기도 지겹고, 여러모로 버라이어티한 2020년이 반이 지났다. 2021년이 온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마음이다. 요새 이말년의 삼국지 강의나, 만화책 킹덤을 보는데, 그 춘추전국이니 삼국이니 하는 시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중화통일이니 뭐니 하면서 맨날 학살, 약탈, 전쟁을 일삼은 거 같더라.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지금은 상대적으로 평온한 시대겠지… 삼대를 멸하고 수십만을 생매장하진 않으니까. 어쨌든, 우리가 너무나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기에, 지구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일에 대해서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2020년이다. 왠지 인류에게 주는 옐로우 카드 같은 2020년 반이 지난 7월.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디제이 오브콜스(Offcourse) 최병문과 29CM의 김혜인이 글을 보탰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 윤태영

나의 의지나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먼저 반응할 때 보통 무언가에 중독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참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 대상을 불문한 중독의 문제와 싸워가고 있지는 않을까. 이왕 할 거 ‘운동 중독’처럼 좀 멋진 타이틀이 붙으면 좋겠으나 통 쉽지가 않고, 나 자신과의 싸움만이 계속될 뿐이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먼저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멀리하고 싶은 존재가 나의 주변에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만큼 께름칙한 일이 없긴 하지만 본인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기에 변화와 새로운 자극을 느끼기엔 제격인 듯하다.

새해 첫날도 아닌데 금연을 시작했다. 느닷없이 문득 나의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고 담배 없는 삶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해서. 흔히들 하는 말로 금연하는 사람만큼 독한 사람 없다더니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온전히 나의 의지 하나로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금연은 피부 트러블과 두통을 비롯한 다양한 금단현상을 나에게 선사해주고 있다. 이렇게 의존도가 높았을까 하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지만, 담배를 끊음으로써 나의 몸이 치유되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명현 현상이라 여기고 있다. 

물론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끊고, 마치 깨달음을 얻은 현자 마냥 굴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온갖 자극에 혹사당했던 시간을 위한 일말의 양심이지 않을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변화이지만 ‘호흡법을 바꿨더니 인상이 바뀌었어요’ 등의 믿기 힘든 이야기처럼 변화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나에게 새로운 태도와 영감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당분간 추가적인 변화는 없을 예정이다. 맛있는 음식에 반주하는 것만큼은 포기하기 힘들 것 같다.


변수를 변주처럼 즐기는 삶 / 김혜인

일도 사랑도 결혼도 모두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의 과정을 스스로 즐기는 편이기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팬데믹 이후로 사회의 안녕과 생존이 달린 산업과 생활양식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고민이 생기면서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다가올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 속에서 나는 어떤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하나라는 철학적 고민에 빠졌기 때문이다. 

딱히 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었기에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읽고, 존경하는 인물의 유튜브를 찾아보다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그는 문학과 음악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원동력도 같은 다방면에 전반적인 관심을 두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자양분이 있는 땅이라 말했다. 학습과 지적 호기심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가 그가 일해야 할 장소나 풍경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고, ‘공간을 느끼는 것’에 건축가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품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아이디어는 선입견을 품고 시작하지 않으며,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완전히 열려있어야 한다. 뻔할 수 있지만 나는 폭넓은 사고와 축적된 지적 자산을 기본으로 한 유연한 태도만이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한다. 

월간 영감 기고를 제안받고 무슨 이미지를 전달할까 고민하던 중 최근 내가 가장 흥분했을 때를 떠올렸다. 로이 에이어스(Roy Ayers)가 9년 만에 ‘재즈 이스 데드(JAZZ IS DEAD)’에서 새 앨범을 발매한다고 소식을 접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동안 그의 예전 앨범을 디깅해서 모으는 재미와는 또 다른 기대였다. 그가 왜 재즈 이스 데드에 들어갔을까부터 궁금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대를 초월한 취향을 필수적으로 가졌으며, 예상치 못한 것을 제시하는 데 강점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번 앨범을 음반사에서는 “as well as something startling, new and unexpected”이라고 묘사했다. ‘Ali Shaheed Muhammad(A Tribe Called Quest’s)’와 ‘Adrian Younge’ 세 명의 콜라보레이션 앨범 중 멜로트론과 비브라폰의 조화가 인상적인 [Synchronize Vibration]을 추천하고 싶다. 이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플레잉 횟수만큼 반감시키고 활력을 주었다. 시대를 초월한 음악은 불안의 시대에서도 끊임 없이 영감을 주는 예술작품으로 존재한다. 

앞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파도와 같은 인생에서 새롭고 기대하지 못한 쪽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늘 긍정적인 자세로 살려고 한다. “우리는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수많은 방식으로 외적 원인에 의해 휘몰리며, 우리의 운명과 결과를 알지 못한 채 동요한다”.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21세기 지금의 우리도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는 없고 불안해하고 동요한다. 하지만 적어도 열려있는 유연한 태도라면 재즈의 무한 변주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즐기면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SNS 잡념 / 박진우

SNS… 영어권에서는 ‘Social Network’라고 불리고 국내에서는 ‘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로 SNS라 불린다. 

VISLA를 하면서 사실 SNS를 안 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외국에선 뭘 하고 있는지도 보고, 요새 사람들 어디 놀러 가는지도 보고, 영향쟁이(인플루언서)가 요새 뭘 올리는지도 보고… 안 보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엄청 올리고 엄청 보는 나지만… 그렇기에 허무함도 동반되는 거 같다. 우린 왜 보여주고 왜 보는 걸까. 뭐가 남나 싶다.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사람 이름을 들어도 아이디부터 기억나는 현상… 옛날에는 요즘처럼 이렇게 이름을 많이 기억할 일이 없었겠지. 아마 인간의 머릿속에는 수백만 년 진화하며 생겨난 ‘지인 폴더’ 같은 게 있고, 그 안에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거 같다. SNS에서 하도 사람들을 많이 보니까 뇌에서 본능적으로 필요 없는 사람, 진심으로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은 삭제하는 느낌이다. 나이 들어서 이름을 까먹는 거 같았는데, 단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은 아닌 거 같다.

인스타그램에 ‘내 활동’이란 메뉴가 있다. 하루에 인스타그램을 얼마나 하는지 알 수 있다. 가끔 지인들을 만나서 누가 얼마나 했나 확인했을 때 내가 시간이 타인보다 적었던 적은 한 번뿐이다. 몸이 아파서 집에서 핸드폰만 본 친구한테 졌다. 아무튼 그만큼 많이 한다는 뜻. 요샌 의식적으로 줄이고 있다. 줄이다가도 ‘아 근데 왜 줄여야 되지?’라는 생각도 든다. 

고로 결론은 없지만 결론인척 말하자면, 이 SNS라는 게, 오랜 시간 SNS 없이 살아온 인류에게 완전히 새롭고, 보이지 않는 어떤 영향을 매우 강력하게 미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똑똑한 빠꼼이라면 좀 더 고민해서 어떤 답을 찾아가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여기까지만 의구심을 가져본다… SNS가 일상이 돼버린, 그 미지의 변화-트리거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막연히 겁을 먹고 SNS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드라마틱한 2020년이었지만, SNS가 없었다면 그 드라마틱한 사건들도 온 지구에 널리 퍼지지 않아 드라마틱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건사고를 SNS을 통해 사사건건 공감하는 우리 지구인들이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진심으로 몹시 궁금한 요즘이다. 


홍콩 / 최병문

미국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지난달 30일 홍콩 국가보안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보장한 ‘일국양제’의 훼손을 막기 위해 거리로 나온 많은 홍콩인의 노력이 수포가 되는 순간이었다.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작년 12월 나는 홍콩에 갔다 왔다. 영화 촬영지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위험하다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한 여행을 포기하기 싫어서 그냥 갔다 왔다. 홍콩은 도시 전체가 영화의 배경일뿐더러 크기도 서울과 비슷하고 대중교통이 편리해서 성지 순례하기 최적의 도시였다.

첫날 찾아간 곳은 구룡의 섹깁메이, 이 동네에는 고급스러운 고층 아파트와 학교가 많았다. 난 이런 부티나는 동네의 한가운데에 있는 섹깁메이 공원을 찾아갔다. 여기는 “폴리스 스토리2”에서 악당들이 주인공인 성룡의 여친(장만옥)을 이용해 성룡을 유인해서 다구리 치려다 역으로 쳐맞은 곳으로, 이 일로 성룡과 장만옥은 잠시 이별하게 된다. 역시 경찰 여자친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아무튼 공원이어서 그런지 쉽게 찾을 수 있었고 평일 아침이라 사람도 없어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촬영지만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 왜 왔나 싶을 정도로 평범한 동네공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운동하던 할머니한테 부탁해서 사진만 찍고 바로 내려왔다.

공원에서 내려와 근처 압리우 시장에서 밥을 먹고 “영웅본색” 촬영지 중 하나인 토카완의 메릿인더스트리얼 센터를 찾아갔다. 친구의 형제를 화해시키려다 머리에 총을 맞는 주윤발, 장국영의 얼굴로 튀는 뻘건 피, 오열하는 적룡… 올드하긴 하지만 의리뽕 가득한 클라이맥스의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꼬추가 있을까. 영화 속에서 메릿센터는 야심가 이자성에게 뒤통수 맞은 주윤발이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다 출소한 적룡과 뜨거운 눈물의 재회를 하는 곳이다. 어렵게 찾아간 센터는 물류창고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꽤 지저분했고 물건들이 계속 들락날락하느라 위험해서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영화 속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1986년으로 잠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재밌었다.

다음날, 마온산 기슭에 있는 챗싱사원에 찾아갔다. MTR로 우카이샤까지 간 다음 다시 버스로 갈아타서 마쿠람이란 동네의 안쪽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 산쪽으로 좀 걷다 보니 사원이 나왔다. 이곳은 성룡의 “취권”, 황정리의 “용호문” 같은 70년대 무협 영화에 가끔 등장하는 장소다. 이 챗싱사원뿐만 아니라 마온산 주변이 그 당시 무협 영화 세트장 그 자체였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와보니 정말 홍콩에서 강호 무림의 배경들을 촬영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더라. 그냥 존나 시골… 사원은 안팎 전체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고 향냄새가 가득했다. 도교 사원 같아 보였는데 귀신 붙을까 무서워서 안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그냥 근처에 잠시 앉아서 촬영 전 합을 맞춰보는 배우들을 상상해봤다. RZA처럼 70년대 무협을 좋아한다면 한번 와볼 만하다.

마온산을 나와서 섹오로 향했다. 섹오는 “희극지왕” 메인 촬영지인데 한국에서 이 영화가 유명해서 그런지 네이버에 찾아가는 방법이 잘 나와 있었다. 덕분에 손쉽게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 시원한 바람과 낮은 집들, 여기저기 보이는 어구들이 강원도 어딘가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을 보는 듯했다. 이런 분위기가 영화 속 주성치와 장백지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에 잘 어울렸던 게 아닐까, 허허…, 해변에서 바라보는 남중국해도 뷰가 지렸고 근처 해안 절벽에서는 패러글라이딩도 가능.

마지막 날은 송환법 반대 시위 6개월과 세계 인권의 날을 기념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로 지하철을 제외한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됐기 때문에 예정되어 있던 폭푸람에 있는 퀸메리 병원에 가는 것은 포기했다. 이 병원은 “영웅본색2” 속에서 장국영이 연기한 송자걸이 죽어서 오기도 했고, 15년 뒤 실제로 장국영 본인이 투신한 뒤 실려 와 사망한 병원이기도 하다(R.I.P). 어쩔 수 없이 일정을 변경해 성룡, 홍금보, 원표 골든 트리오의 히트작 “프로젝트A”의 촬영지를 구경하기로 했다. 먼저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레이유문 해군공원에 갔는데 어라? 입뺀 당했다. 예약한 사람만 입장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한국에서 왔다고 사정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ㅅㅂ 포기하고 완차이 금마륜산에 있는 보웬로드를 찾아갔다(“프로젝트A 2” 촬영지). 여기는 홍콩 헤리티지 하이커 가이드북에도 소개될 만큼 유명한 곳(?)이었지만 시위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어 걸어 다니는 나에게는 찾아가기 너무 힘든 산 중턱에 있었다. 시발 말이 헤리티지지 막상 가보니 북악 스카이웨이랑 비슷하더라…

이후에 청킹맨션과 스텁스로드에 있는 굿뷰가든에도 들렸었는데 온종일 걷느라 너무 힘들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대충 보고 사진 몇 장 찍은 게 전부다. 그러고 저녁에 템플 스트릿 야시장으로 넘어가서 가져간 돈 다 떨어질 때까지 혼자 술 처먹고 여행 끝냈다.

나는 오래된 것에서 영감을 많이 받지만 내가 사는 서울에서는 뭐든 빨리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묵혀진 향기를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40년 전 영화의 촬영지 성지순례가 가능할 만큼 오래된 것들이 넘쳐나는 홍콩은 나의 후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날 조금 힘들었지만 나름 재밌게 돌아다녔던 12월의 짧은 3일을 회상하며 홍콩에 드리운 어두운 먹구름이 밝게 걷히기를 바라본다.


에디터│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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