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영감ㅣ2017년 7월호ㅣ문지석 이일주 기고

여행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선사한다. 거창한 유럽 여행이 아니라도 좋다. 발걸음을 이동 경로에서 잠시 트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 펼쳐질 지 모르는 일. 어떤 경험이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귀한 것으로 변하니까.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보자. 7월 영감에는 철골공 문지석, 일러스트레이터 이일주가 함께했다.

 

애니메이션ㅣ건담 시리즈

건담을 보는 이유가 뭘까. 로봇이 존나 멋있으니까, 우주에서 싸워서, 스타워즈보다도 몇 배는 멋진 빔 샤벨을 들고 칼질하니까? 그딴 거 아니다. 나는 가끔 선택의 갈림길에 서거나 앞날이 왠지 좆된 거 같은 기분이 들 때 꼭 건담을 봤다. 주인공 성격이 좀 등신 같긴 하지만 수백 번의 소모적인 싸움을 치러 오며 그는 꼭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았다. 결국, 마지막은 전부 다 목숨 건 다이다이로 끝나는 게 이 건담이란 만화의 결정적 묘미인데 그게 그렇게 통쾌할 수 없다. 나는 좀 위험한 일을 해서 그런지 언제 어디서 떨어질지 아니면 대가리가 깨져서 뒤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혼자서 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면, 나도 모르는 새 우울함에 빠지곤 한다.

그럴 때 건담이란 만화가 많이 힘이 되어주곤 했다. ‘그래, 일하다 뒤지는 건 결국 자신하고 싸우다 뒤지는 거니까. 그래도 그건 건담만큼 멋진 거야’라는 이상한 자기합리화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고, 그 뒤론 물불 가릴 게 없어졌다. 이젠 위험한 이 일도 좀 재밌어졌으니까. 정말 적극적으로 이 건담이라는 만화를 추천하고 싶은데, 우울하거나 선택 장애가 오거나 앞날이 깜깜한 새끼들은 꼭 건담을 보길. 여기 나오는 새끼들 전부 다 싸움밖에 모르고 내일 당장 뒤져도 이상할 거 없는데 이길 수 있다는 이상한 희망을 품고 산다. 그게 우리와 좀 비슷하걸랑.

철골공 문지석

 

 

음악ㅣTyler, The Creator – PERFECT

타일러(Tyler, The Creator)의 열성 팬은 아니지만, 최근 골프 왱(Golf Wang)과 컨버스(Converse)의 협업이 수면 위로 떠 오른 까닭에 그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Tyler, The Creator – PERFECT Featuring Kali Uchis And Austin Feinstein” 뮤직비디오는 타일러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면서 다시금 찾아본 영상으로, 하나의 화면을 두 개로 나눠 상반된 ―하지만 연결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핑크빛 배경 해바라기 사이에서 노래하는 칼리 우치스(Kali Uchis)와 하늘색 벽을 뒤로 한 채 온몸에 나비를 뒤집어쓰고 멍하니 리듬만 타는 타일러의 모습은 단박에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곡이 무르익어가면서 오스틴 페인스타인(Austin Feinstein)이 등장하고, 서서히 칼리에서 거리를 두던 카메라는 오른쪽 화면이 오스틴과 타일러를 투 샷으로 잡을 때쯤 다시 칼리에게 다가간다. 한 화면이 인물에 접근하면, 다른 화면은 인물에게서 멀어지고, 그 반대의 상황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노래 안에 좌우의 합이 ‘완벽(Perfect)’을 이루는 연출을 보여준다.

이 영상을 어째서야 지금 봤는지 아쉬움이 들 만큼 “Tyler, The Creator – PERFECT Featuring Kali Uchis And Austin Feinstein”은 짧은 플레이 타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번 감상해보길.

VISLA 에디터 / 포토그래퍼 백윤범

 

 

배우ㅣ미야자와 리에

얼마 전, 별 생각 없이 ‘일본 씨름’으로 불리는 스모에 관한 정보를 검색했다.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던 차에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스모 선수는 건강하지 못해서 빨리 죽는 건가?’, ‘현역에서 은퇴하면 살을 빼는지?’, ‘젊은 세대에게 스모는 얼마나 인기가 있을까?’ 따위의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의문이 들어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재일 야쿠자와 관련 있다는 65대 요코즈나 출신 타카노 하나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활동했다 ― 라는 선수를 알게 됐다. 이 선수를 검색하다 보니 그가 19살의 나이에 18세 미녀 배우와 약혼한 뒤 결국, 결별로 끝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맞닥뜨렸다. 일본에서 상위권 스모 선수는 부와 명예를 얻고, 야쿠자와 엮이고, 인기 여배우와도 염문설이 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일본의 탑스타가 커리어 정점에 있을 때, 꼭 야쿠자 관련 인물과 염문설에 휩싸이는 걸 보아왔기에 타카노 하나와 약혼한 그 여인에 호기심이 생겨 계속 파고들었다.

염문설의 주인공은 바로 미야자와 리에(Rie Miyazawa). 18살 당시 모습을 보니 어마어마한 미인이다.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오서방 점 위치에 왕 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데, 알고 보니 그녀는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혼혈로, 어머니 미츠코는 롯폰기 호스티스 출신. 미츠코 ― 일본에는 극성 맘을 ‘리에 마마’라는 별칭으로 조롱하는데, 그녀에게서 유래된 것 ― 는 일본에서 출산한 리에를 남겨둔 채 네덜란드에서 남편과 살다가 이혼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때부터 리에를 키웠다. 딸의 외모가 특출난다고 여겼는지 미츠코는 11살의 리에를 연예계에 데뷔시킨다. 각종 광고에 노출되며 인기가 상승하자, 호스티스를 접고 딸의 매니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 리에는 톱스타로 거듭난다. 그러나 어머니의 비인간적이고 탐욕적인 구속으로 그녀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감독이자 희극인인 기타노 다케시가 묶는 호텔방에 리에가 찾아와서는 “어머니가 가라해서 왔다”라고 말하자 기타노가 다독이고 돌려보낸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리에가 타카노 하나와 약혼하며 사랑을 나누던 그때,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8살의 나이에 전성기를 누리던 리에가 돌연 누드집을 낸 것. 그녀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큰돈을 벌고 싶었던 요량인지, 어머니의 강요로 촬영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991년도에 발간된 이 사진집은 150만 부 ― 사진계에서는 전설로 기록되어 이후에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판매 부수라고 ― 이상 팔리며 전 세계에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리에의 누드를 찍게 만들어 결혼을 나락에 빠뜨리려는 큰 그림을 미츠코가 그렸다는 설도 있다. 타카노 하나와의 파혼까지 겹쳐 거식증, 불륜설, 자살미수, 숱한 염문설 등 다양한 사건, 사고를 겪고 홍역을 치른 뒤 리에는 2000년대 복귀했다. 현재 최고의 배우로 올라서기까지 오랜 고통이 뒤따른 셈. 미녀 톱스타와 스모 선수의 사랑, 호스티스 출신으로 탐욕에 가득 찬 어머니 ― 2014년에 사망했다 ―, 누드집 산타페 등등 자극적인 단어로 얼룩진 이 이야기가 이번 달, 내 영감이다.

VISLA 그래픽 디자이너 박진우

 

 

Illust. 이일주

교통수단ㅣ지하철

​많은 창작자에게 공통적인 영감의 원천은 아마도 일상일 것이다. 요새 나는 ‘도시’라는 주제에 흥미를 두고 있는데, 여기서 얘기할 것은 그중 현대의 문명화된 사회 구성원 다수를 차지하는 인간형인 ‘직장인형’ 인간을 매일 시작하게 하는 운송수단, 바로 지하철이다. 출퇴근 시간의 열차 내부는 다수의 사람이 좁은 공간을 꽤 장시간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들 누구에게나 주어지며 매일 반복되는 이 시간의 모습을 관찰하면 현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 대부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탄생하면서 지하철 풍경은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완전히 바뀌어 버렸고, 따라서 책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들어졌다. 그들이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주로 모바일 게임, 페이스북 게시물, 포털사이트 뉴스, 주말에 먹으러 갈 맛집 찾기다. 매일 지하철에서 수많은 인간이 쏟아져 나오는 풍경을 보면 종종 이상한 기분이 들며 온갖 잡념에 빠진다.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겨울에는 검은색과 카키색, 여름에는 줄무늬 옷. 김한민 작가가 언젠가 한국인을 그리 많지 않은 유형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일러스트레이터 이일주

 

 

쇼핑몰ㅣ돈키호테

최근 휴가차 도쿄에 다녀왔다. 3년 만에 다시 이 거대한 도시를 방문하니 다른 것보다도 우선 드는 생각은 ‘아, 역시 일본은 습하구나’. 사우나에 들어온 듯한 찝찝함을 뒤로 하고 고개를 들자 3년 전에도 그랬듯, 글로 다 설명하기 힘든 인파의 물결과 우뚝 선 쇼핑몰에 기가 눌렸다. 쇼핑만 하기에도 4박 5일이 부족하다는 여자친구의 말에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로라하는 유명 옷가게와 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점을 돌아다니다가 일본을 상징하는 쇼핑몰, 돈키호테에 들어섰다. 오죽하면 ‘돈키호테’라는 검색어만 던져도 꼭 사야 할 품목 리스트를 친절히 정리한 블로그가 수십 페이지나 나올까. 널찍한 공간을 빼곡하게 채운 물건, 왠지 이곳에서 사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은 수많은 세일 품목으로 가득한 돈키호테는 쇼핑이라면 치를 떠는 내게도 온갖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근처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온 듯한 서양인 무리를 비롯해 쇼핑 카트에 인형부터 돼지고기까지 가득 담은 일본 여성, 계산대 앞에서 춤을 추는 흑인이 한 데 모인 풍경을 보며 이 돈키호테라는 장소는 인간에 내재된 어떤 욕망을 부추기는 최고의 촉매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저 시원한 음료수 하나 마시고 싶었지만, 작은 크기의 음료수 캔은 보이지 않았다. 대용량의 음료를 값싼 가격에 팔면 팔았지, 음료수 하나 사러 올 거면 자판기에서나 뽑아 먹으라는 돈키호테의 위용에 돌아선 나는 하릴없이 티 쪼가리나 만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럴듯한 부티크나 빈티지 숍에서는 작은 액세서리 하나를 골라도 신중해지는 광경을 돈키호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값싼 맛에 싸구려 음식을 잔뜩 담아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내 모습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할인가의 식자재를 한 웅큼 집어 카트 바구니에 턱턱 던지는 사람들을 보니 꼭 사야 할 물건을 적은 체크 리스트 따위, 이 거대한 탑에서는 그저 종이에 적힌 글씨일 뿐. 되려 놓쳐서 못 산 물건은 없는지 발걸음을 자꾸 되돌리는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게 무사 수행하는 ‘돈키호테’야말로 돈키호테가 물리쳐야 할 적은 아닐지. 돈키호테는 24시간 밤새도록 영업한다. 결국, 이 성의 주인은 천장까지 쌓인 물건이며 파트타임으로 계속 교체되는 직원은 그들이 고운 자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계속 채워 넣고 매만지는, ‘산초’였던 것이다.

VISLA 편집장 권혁인

글ㅣVISLA, 문지석, 이일주
커버 이미지ㅣ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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