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DELIGHT – 지친 영혼을 달래줄 여름 보양식

EDITOR’S DELIGHT : 매 회 다른 즐거움, 관심에 관한 범주를 설정하고, 비즐라 매거진 에디터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숨이 턱 막히던 더위가 무섭게 불어닥친 태풍 카눈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한풀 꺾였다. 말복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서늘한 바람이 벌써 가을을 알리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뙤약볕 아래 이태원 언덕배기 사무실로 매일같이 출퇴근했던 에디터들의 몸과 마음은 적잖이 피로해졌을 터. 과연 이번 여름 이들의 지친 영혼을 위로한 보양식은 어떤 음식일지, 각자의 애달픈 사연을 만나보자.


황선웅 – 김치말이국수(해정국수)

2년 전 여름에는 열무국수를 먹으러 광장시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여자친구의 소개로 먹어본 것이 계기였는데, 살얼음 동동 뜬 시원 새콤한 열무국수의 묘한 중독성에 잘 헤어 나오지를 못하겠더라고. 입안을 휘감는 감칠맛이 불현듯 생각나는 날이면 퇴근 후 광장시장으로 향해 열무국수와 그 단짝인 마약김밥을 흡입하곤 했으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열무국수의 맛이 변하여 이와는 손절하게 됐다. 맛이 변한 것은 일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얼음 없이 미적지근한 국물에 푸석푸석 뚝뚝 끊어지는 면발이 뇌리에 깊이 박혀 쉽사리 방문을 재고하기 어려웠다. 한결같은 맛을 선보이는 게 내겐 꽤 중요하다. 맛이 복불복되는 순간 난 지갑을 닫는다.

열무국수의 대체제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동묘역과 신설동역 사이에 자리한 해정국수의 김치말이국수다. 언제나 한결같은 맛에 지난 2년 동안 너무 자주 먹어 내 여름 보양식까지는 아니지만, 특별히 무더운 여름 말복이라 더욱 애타게 그리운 맛. 살얼음 뜬 육수에 토핑으로는 김과 김치, 오이만이 소박하게 올라간 냉국수는 과하지도, 부족함도 없다. 차가운 얼음 육수는 삶아진 중면을 더욱 꼬들하게 만들고 난 이 탱글한 면을 입안 한가득 욱여넣어 모든 치아를 사용해 우걱우걱 씹는다. 처음 김치말이국수를 입 안에 넣어 씹는 순간에 해정국수 사장님을 감칠맛의 대가로 인정했었다. 곱빼기에 오이를 제거하고 먹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자주 가서 오이가 알아서 빠져나온다. 가게는 잔치국수, 콩나물비빔밥 등의 여러 가지 메뉴를 판매하는데, 여름에는 김치말이국수를 꼭 먹어보길. 덥고 습한 날씨에 더욱 알맞은 메뉴지만,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맛을 보장한다.


오욱석 – 대학로점 한정 드래곤 츄카 소바(부탄츄)

이제는 한국에도 일본 본토의 맛과 유사한, 꽤나 훌륭한 라멘을 파는 가게가 많아졌다. 마포구를 시작으로 강남과 성수 인근, 그리고 부산이나 대구 같은 지방 대도시에서도 수준 높은 라멘을 맛볼 수 있다.

십수 년 전 상수 하카다분코에서 처음으로 라멘을 먹고, ‘와, 이게 진짜 일본 라멘의 맛이구나’ 감탄했던 때가 무색하다. 메뉴의 전문성 또한 점점 세분화되어 그 스프에 따라 돈코츠부터 이에케, 츠케멘, 마제소바 등등 라멘 한 그릇 먹는 데에도 머리를 적잖이 굴려야 한다.

나 또한 이래저래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라멘 집 몇 군데를 찾아 돌아다녀 봤는데, 뭐랄까 가끔씩 피로해지는 순간이 있다. 오늘은 이 가게가 오픈했을까, 재료 소진으로 일찍 닫는 건 아닐까, 여기는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식사하기도 전에 이런저런 걱정부터 드는 것이다.

이렇게 라멘을 먹으러 가기까지의 결심조차 피곤할 때, 그럼에도 너무나 라멘을 먹고 싶을 때 난 ‘부탄츄’로 향한다. 여기저기 끗발 좀 날리는 라멘 집이 콧대를 드높이고 있는 지경에도 부탄츄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직한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사람이 마구 몰리는 점심때가 아니라면, 딱히 줄을 설 필요도 없다. 언제 가도 흡족하다.

홀로 충정로에 살던 시절 부탄츄를 퍽 자주 갔다. 기분이 좋을 때보다는 뭔가 고민이 있거나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부탄츄를 찾았던 것 같은데, 그 깊이에 따라 방문하는 지점도 달랐다. 가벼운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는 신촌점으로, 길게 곱씹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는 대학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5km쯤 되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 도착한 부탄츄, 그리고 라멘 한 그릇. 사이드디시로 가라아게까지 곁들여 허겁지겁 먹다 보면, 세상만사 고민이 다 뭔지. 머릿속은 면발로 가득 차고, 스프의 진한 염분에 잡념까지 사르르 녹아내린다.

포만감과 함께 문을 나선 뒤 다시 걷는다. 한 거라고는 밥 한 끼 먹은 것밖에 없는데, 근심을 한결 덜어낸 것 같다. 푸짐한 라멘 덕에 몸은 무거워졌는데,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장재혁 – 윙봉 반반(OK 치킨)

지난겨울 약수로 집을 옮겼다. 이 동네엔 특이하게도 ‘이북식 찜닭’을 파는 점포가 꽤 여럿 있다. 허여멀건한 닭백숙과 부추 그리고 특제 소스의 조합은 가히 무더운 여름 지친 영혼을 달랠 보양식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정작 발걸음은 ‘이북식 찜닭’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그 매력의 원천이 바로 약수역 5번 출구 코앞에 위치한 ‘OK치킨’이다. 그렇다, 보다시피 어느 동네에서건 찾아볼 수 있는 프라이드치킨을 파는 호프집이다. 하지만 아무리 맛이 좋다 한들 왠지 모르게 날을 잡고 먹어야 할 것 같은 정통 한국식 백숙보다는 맥주 한 잔 시켜놓고 아무 생각 없이 먹을 수 있는 호프집이 여러모로 속 편하다.

이 집 참 묘하다. 나이 지긋하신 동네 주민들로 가득한 분위기 탓인지(보통은 MZ 청정구역이다) 기본 안주 강냉이의 맛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메인 메뉴 치킨 역시 더할 나위 없다. 치킨과 통닭, 그 사이 어디쯤에 포지셔닝한 프라이드치킨의 튀김옷도 예술이지만 ‘OK치킨’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양념치킨을 맛봐야 한다. 보통 금방 질려버리는 끈적한 양념 소스와는 다르게 한방향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입맛을 돋운다. 그렇기에 다른 치킨집이라면 금방 물려버릴 ‘윙봉반반’의 조합도 가능하다. 물론 기본 프라이드 치킨도 포기할 수 없기에 ‘반반’으로 화합하는 걸 추천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닭이 조금 작다는 사실. 하지만 그럴 땐 과감하게 반 마리를 추가하면 된다. 기본 치킨이 18,000원에 반 마리 추가는 10,000원이니, 거진 3만 원은 줘야 먹는 프랜차이즈 배달 치킨을 생각하면 이보다 혜자로울 순 없다. 약수역 사거리에서 ‘OK치킨’을 향해 올라오다 보면 또 하나의 치킨집이 눈에 띄는데 쇼윈도우에 누워있는 닭들의 애매한 색감 덕에 ‘OK치킨’의 치킨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치킨에 관한 취향이라면 한국 국민 머릿수만큼 다양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치킨은 역시 호프집에 직접 방문해 먹는 게 최고라는 것. 혹여 약수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OK치킨’의 문을 두드려 보는 것도 좋겠다.


한예림 – 뼈해장국(본가왕뼈감자탕 한남역점)

‘속이 허하다’라는 감각을 말로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문자 그대로 내장이 비어 공복감이 드는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 기운이 부실하여 코어가 흔들리는 감각일 수도 있겠다. 필자가 이 표현을 사용할 땐 보통 밤을 새우며 작업하다 아침 동이 트는 걸 볼 때, 밤새 마신 술로 속이 울렁거려 한차례 게워 내고 쉬고 있을 때, 하루 종일 끼니를 챙기지 못했으나 무언가 먹기에 의욕이 없을 때, 공을 들인 것들이 나의 기대만큼 충족되지 않을 때 등 다양한 상황들에서 느끼는 헛헛한 감각을 퉁치며 부르기 좋다. 

이 기분에서 재빨리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도심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24시 뼈해장국 집에 가는 것이다. 국물을 계속 고아야 하기 때문에 24시간 동안 운영되는 뼈해장국 가게들은 이른 새벽이든, 늦은 오후든 부담 없이 가도 좋은 ‘백반 계 편의점’ 같은 곳이다. 

대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여러 뼈해장국 집을 전전해 보았지만 기억에 남는 맛집은 딱히 없다. 맛과 장소보단 따뜻한 국물을 들이켜 당장 빈속을 채웠다는 느낌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어디든 좋다. 네이버 지도에 가장 가까운 뼈해장국 가게를 서치해 발길을 옮긴다.

이번에 찾은 가게는 한남역에 위치한 ‘본가왕뼈감자탕’으로, 입구에 ‘오후 10시 이후엔 미성년자 출입 금지이니 신분증 검사를 하겠다’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다들 음주가무 끝에 해장술을 마시러 많이 오는 가게임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이 가게의 뼈해장국은 10,000원으로 대다수의 가게들이 8,000원~9,000원 정도 받는 정도에 비하면 살짝 비싼 감이 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고 뚝배기가 흘러넘칠 것 같은 실한 비주얼에 입을 다물게 되었다. 밥 한 공기까지 같이 먹으면 너무 배부르기도 하고, 1000kcal에 육박하는 무시무시한 칼로리에 조금 부담스러워, 밥은 제쳐두고 국물과 고기에만 집중하여 먹는다.

허한 속을 채울 수만 있다면 최대한 다양한 가게를 방문하는 것이 목표다. 적어도 내가 자주 가는 동네의 뼈해장국 가게는 모두 섭렵해 볼 예정이므로 앞으로도 유목민 생활을 이어나가 볼 계획.


박진우 – 서울미트볼 ‘미트볼 도시락’, 지코바 순살양념 매운맛

과거 순국선열들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던 마음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엇비슷한 각오로 다이어트 결심했다 해도 긴장의 끈이 풀려버리는 어느 날 밤.. 식탐은 악몽처럼 찾아와 쿠팡이츠 앱을 켜도록 나를 조종한다. 현재 나는 불행하게도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므로 모든 끼니를 보양식이라고 생각하고 먹고 있다. 평소 매 끼니 보양식이라고 먹고 있으므로 올여름 가장 자주 먹은 두 음식을 이야기해보겠다. 그 음식들은 소위 치팅데이라고 정해놓은 날들의 낮과 밤을 독점하고 있는데, 나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낮과 밤의 황제에 대해서 알아보자.

점심 보양식은 서울미트볼이다. 몇 개월 전 서울미트볼 선유도역점에서 맛을 본 뒤 집 근방 공덕역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주말 점심 90퍼센트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평일엔 출근해서 먹기 때문에 못 먹음) 최근 서너 달간 30번 정도  먹었더니 좀 질리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미트볼의 ‘미트볼 도시락’의 안정적인 맛과 구성은 보통 매력적인 게 아니다. 구성이 타이트해서 음식물 쓰레기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미트볼 도시락’은 미트볼 7알, 밥, 반숙 계란 후라이, 감자튀김, 샐러드, 빵 2조각, 무피클로 구성이 참 알차다. 일 처리가 빨라서 보통 배달이 도착하면 아주 뜨끈하다.

첫입으로 미트볼 한 알에 소스를 잔뜩 묻혀서 입에 머금으면 침샘이 강하게 자극된다. 빨리 흰쌀밥을 입에 넣어야 한다. 양도 아주 적절하다. 나에게는 흰쌀밥이 조금 부족하지만 일반적으로 봤을 때 넉넉히 알맞은 양이다. 

서울미트볼은 마포구청점을 시작으로 서울 서쪽 지역을 점령 중이다. 지점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사는 곳이 서울의 서쪽이라면 지금 쿠팡이츠를 켜서 배달 가능 지역인지 확인해 보면 어떨까. 일상 보양식으로 강력히 추천한다. 세 가지 소스의 맛이 있는데 이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첫 번째 것과 세 번째 것이 좋다. 다른 메뉴인 스파게티류도 먹을 만하지만 ‘미트볼 도시락’이 있으니, 언제까지나 단역일 뿐이다.

이제 저녁 보양식을 이야기해 보자. 한국에서는 밤이 되면 닭 귀신이 찾아와 사람들이 치킨을 시켜 먹도록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고 한다. 나는 프라이드치킨은 거의 시켜 먹지 않는데, 그렇다고 닭을 안 시켜 먹는 것은 아니다. 나의 오감을 자극하는 저녁 보양식은 여러분도 잘 아실 지코바다. 지코바.. 지금도 먹고 싶다. 돼지력을 보유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항상 공기밥도 추가하는데 요새는 마요네즈도 제공하고 있어서 참 큰일이다. 주말이 되면 평일에 적게 먹었기 때문에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아주 깨끗한 정신으로 지코바 순살 매운맛을 시킨다. 나는 지코바를 한 개를 한 번에 다 못 먹는데, 그래서 남겼을 때 떡이 있으면 딱딱해지니까 초반엔 떡 위주로 먹는다. 보통 이런 자극적인 음식은 먹다 보면 물리는데 지코바는 이상하게 안 물린다. 7~8조각이 남으면 배가 부르다. 이 악물고 먹으면 다 먹겠지만 그건 미련한 짓이라는 걸 수없이 뼈저리게 느꼈으니 참는다. 아무튼 그 7~8조각은 내일의 맛있는 지코바 볶음밥이 될 거니까 잘 보관하도록 하자. 사진은 따로 찍어 놓은 게 없어 나선욱님이 지코바 먹는 영상으로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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