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DELIGHT – 장송곡, 내가 갈땐 이 노래를 부탁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만큼 어려운 건 없을 것이다. 받아들이는 건 고사하고, 비슷한 상상을 하는 것조차 마음이 불편하다. 얼마 전, 지인과 장송곡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태어나서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분야(?)였다. 죽음 이후 곡 선정이라니… 

예전에 아는 친구가 종종 유서를 쓰던 게 생각났다. 이유도 알 수 없이 매번 정기적으로 썼다. 

죽음을 맞이하는 난이도로 치자면 장송곡을 고르는 게 유서를 쓰는 것보다는 조금 쉬운 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송곡… 왠지 에디터스 딜라이트에 적절하다. ‘Delight’인 듯, ‘Delight’가 아닌 것 같은 이 주제. 죽음을 두고 내리는 선택이기에 마냥 장난치긴 어려울 것. 각자 삶을 대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았다. VISLA 친구들, 너희가 원하는 장송곡을 알려줘!


Ryuichi Sakamoto – Ubi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16번째 솔로 앨범 [async]가 내 마지막 BGM, 장송곡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수록곡 “ubi”로 장식했으면 한다. 취향과 멋을 이해하는 관점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류이치 사카모토 그리고 그의 음악을 동경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그중에서도 본작을 뽑은 이유는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가 만든 가상 영화의 OST라는 인상적인 콘셉트 아래 2014년, 인두암 판정 이후 생사의 갈림길에서 내놓은 탓인지 죽음에 대한 고찰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익숙함과 권태 사이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장송곡, 그 심오한 주제는 삶과 가치관 그리고 과거 또는 그 마지막 시점에 다다를 미래까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어느 하나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성숙해지면 달라질까? 자신이 없다. 그런 점에서 삶의 고뇌가 담긴 “Life, Life”, 폴 보울스(Paul Bowles) 소설을 기반으로 한 1990년 영화 “The Sheltering Sky”에서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Because we don’t know when we will die…)”로 시작되는 긴 구절이 포함된 곡 “full moon”, 곡의 선율뿐만 아니라 삶을 향한 애착 그러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닮고 싶다. 적당히 구슬픈 음악 “ubi”가 흐른다면 누군가에게 남긴 기억과 지난 상념을 정리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철빈(Editor)


Primal Scream – Come Together

주제를 전달받고 무슨 노래를 고를지 생각한다. 장례식이라는 주제에 맞는 슬픈 노래 혹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서 고민한다. 내 결론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선택하기로. 이 결정을 내린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1. 장례식에서 나오는 음악이 나를 대변하는 노래면 좋겠다.
2. 나는 슬픈 노래를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고른 노래는? 이 부분까지 쓰고 약 3분간 타이핑을 못하다가 결국 고른 노래는 프라이멀 스크림(Primal Scream)의 “Come Together”다. 왜냐고? 내가 생각한 내 장송곡은 뭔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노래였으면 좋을 것 같아서다. 누군가는 내 죽음을 슬퍼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가운데 그동안 최장민이라는 챕터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 면에서 이 노래는 우울하지 않게 무언가를 마무리할 때 듣기 좋은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이 곡은 후반부에 성가대와 함께 많은 이의 목소리가 겹치며 “Come Together”를 반복해서 외치는 구간이 있다. 내 장례식을 상상해보니 이렇게 여러 명의 훌륭한 보컬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프라이멀 스크림이라는 밴드의 음악을 들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름만 알던 밴드였는데, “Come Together”가 수록된 [Loaded] 앨범을 듣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접했다. 반년 전 밴드 웨터(wetter)의 보컬 원빈의 추천으로 듣기 시작한 이 앨범은 명반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희노애락이 다 담긴 앨범 같다. 사실 만약 이번 주제가 하나의 ‘앨범’이었다면 아마 이 앨범 전체를 고르지 않았을까.

최장민(Director)


김창완 – 순풍산부인과

죽음이란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경험.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섭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생각하면 종교가 왜 생겨났는지 알 법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애초에 슬픈 거라 ‘긍정과 행복’이란 가면이고,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린 거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건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삶에서 작든 크든 즐거움, 행복, 의미를 뭐가 됐던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본론으로 와서 저세상으로 가버린 입장에서 장례식에 뭔 음악이 나오던 아무 상관 없지만, 굳이 신경 쓰이는 것을 찾자면, 내 죽음을 애도해주는 사람들이 울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난 멋과는 거리가 있어서 장송곡에서 멋을 찾기는 조금 쑥스럽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생전에 나를 기억하며 슬픔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를 혹은 내가 저세상에 가서 즐거워할지도 모를 그 사람들을 내가 가버린 그 순간까지 피식하게 만들 수 있는 노래는 뭘까. 엄숙하고 슬픈 장례식 현장의 긴장을 풀어버릴 노래는 뭘까..

인간은 각자 삶의 주인공이자,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 살아가려 한다. 본인은 진지하지만,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코미디고 시트콤이 아닐까. 그걸 가장 잘 표현한 곡, 내가 생각한 장송곡은 순풍산부인과의 오프닝 송이다. 산부인과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오늘은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 날까”이다.

매순간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고, 죽음은 보통 마지막을 의미한다. 죽음을 알리는 장송곡, 그 ‘마지막’ 가사가 ‘탄생’이라니,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나이스하다. SBS에서 저작권 문제로 순풍산부인과 영상과 음악이 동시에 재생되는 콘텐츠를 다 없애버려서 조금 어색하지만, 사진과 함께 감상해보자.

박진우(Graphic Designer) 


Harold Danko – When She Smiles

정년 퇴임을 앞둔 교수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생각해보면 인생은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구름 같아요. 그냥 쉬었다 가세요”. 담배를 쥔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떨리며 머리는 다 허연 교수를 쳐다보고는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렇게 늙게 될 날이 올까?’ ‘나도 늙으면 이 사람과 동일하게 인생을 바라보게 될까?’ 나이가 지긋이 든 사람을 마주할 때면, 그는 나보다 비교적 죽음에 가깝다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이 곧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내게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년에 진입한 이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죽음이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라 추측하곤 했다. 그 의미가 근심이나 공포, 안도감과 기대와 같은 감정을 포함하든 간에 말이다.

나는 살아 숨 쉬는 동안 내게 닥칠 죽음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수식하는 갖가지 용어만이 공허하게 그 주위를 맴돌고, 자칫하면 그 용어가 지닌 의미가 죽음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내가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에 관해 깊이 고민하고 왈가왈부하는 일이 불편한 감정을 필수적으로 수반할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죽음을 아직 자신에게 닥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심드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죽음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죽음 이후 영원한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꿈꾼다. 이처럼 죽음을 정의하는 일이 각자의 의식이 결단하는 문제가 되고 나니, 나는 심장이 멎어 죽을 수도 있지만, 의식적으로는 이미 죽어있는 채로 인생을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송곡으로 어떤 것을 골라야 하나 한참을 헤맸다.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지, 초래될 결과를 추측하고 이를 충분히 고민해보기 마련이지만, 죽음만큼은 살아있는 동안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인지 장송곡을 고른다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 곡이 나의 죽음을 경험할 누군가에게 특정한 감정을 유발할 수 있을지는 기대해볼 수 있겠지만, 죽음이라는 의식의 문제를 내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대다수의 장송곡이‘슬픈 선율’을 특징으로 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이미 공감하는 동일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며 그러한 곡을 찾다가도, 죽음이라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으니 훌훌 털고 기분 좋게 가보자며 이에 적절한 곡을 골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막바지에 고르게 된 것은 가장 좋아하는 악기의 소리를 아름답게 담아낸 곡이다. 들으면서 내 장례식을 상상해봤다. 너무 덧없나?

이준용(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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