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꿈꾸는 공간이 있을 것이다. 그 공간은 엄청나게 비싼 어딘가일 수도, 수조 원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환상 속 공간일 수도, 또 어떤 누군가는 환상 속 공간을 꿈꾸다 현실에 부딪혀 기존의 환상이 현실 속 어딘가로 탈바꿈했을는지도 모르겠다. VISLA 친구들은 어떤 공간을 꿈꾸고 있을까. 지금 사는 집에서부터, 한국 최고가의 아파트, 일본의 작은 도시, 실존하지 않는 공간 등 다채롭게 추려진 리스트를 읽어보며 자신이 꿈꾸는 공간을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
이준용(Editor)
얼마 전, 새집으로 이사했다. 집 크기는 이전 집과 비교했을 때 두 배가량 넓어졌고, 도로변으로 난 창문은 더 큼직해졌으며, 집 내부에는 세탁기도 딸려 있다. 당장은 단점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만족스러운 공간이다. 새 책장에 책도 꽂아보고, 접어놓은 옷더미를 다시 펼쳐서 각도 잡아보며 짐 꾸러미를 하나둘 풀어갔다. 애초에 이삿짐이 많지 않은 처지라 정리하는 일이 얼마 걸리지 않지만, 새집으로 이사한 기분에 한껏 심취해서 없는 일거리를 만들어가며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렇게 며칠 동안 지내다가, 더는 할 게 없다고 느끼고 나서야 떠나온 옛집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이전에 살았던 집은 춥고 쌀쌀한 1월에 입주했는데, 당시 걱정이 꽤 많았다. 모든 일이 처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연고 없는 낯선 도시에서 두 다리 뻗을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떠올려보면, 이사 온 집을 통해 느끼는 지금 감정과 하나 다를 것 없는 것이었다. 그곳은 비좁지만 혼자 지내기 부족함 없었고, 창밖을 열면 우거진 나무 사이로 새가 지저귀곤 했으며, 코인 세탁방에서 가끔 마주친 이웃 할아버지와 잡담을 나눴던 그런 인간적인 동네였다. 눈에 거슬리는 것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그나마 주어진 상황에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한 그런 날들이었고, 하루하루 대체로 만족하며 지냈다.
글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새로 이사 온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은 생각뿐이다. 동네 여러 군데 돌아다니며 끄적인 노트에는 내 생각의 일부가 흔적으로 남아있었는데, 숨 돌려 다시 읽어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내 우선순위와 지금 집 조건과 크게 일치하지 않았다. 내가 어리석은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의도적으로 체념해온 것인지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혹여나 내게도 이상적인 장소가 있으려나 했다. 하지만 창의력이 워낙 모자란 나는 금방 단념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기대할 수 있는 많은 조건이 일시적이거나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며 조심스러웠다. 결국, 내가 애써 세운 기준마저 의구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을 상상해보고 나니, 모든 것이 쉽게 무너질 거라 생각했다. 어리석지만 이렇게 집을 구했나 싶다. 다시 한번 이사 갈 기회가 생길지 알 수 없지만, 그 집이 어떤 곳이든 간에 지금과 비슷한 만족감이 들 것만 같다.
지금 사는 집
오욱석(Editor)
어느덧 공중파 TV까지 점령한 각종 먹방 프로그램에 이어 이제는 거주할 ‘집’을 구해주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에 입각한, 어쩌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쉽게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콘텐츠가 왜 이제야 등장했는지 의표를 찌르는데, 뭐 그만큼 내 몸 하나 뉠 공간을 구하는 게 점점 더 녹록지 않아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
나 역시 독립 이후 네 번의 이사 경험으로 서울에서 방 한 칸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번거로우며, 힘 빠지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건물의 연식과 면적, 직장과의 거리 등 고려할 사항이 한둘이 아니지만, 한정된 예산은 반드시 무언가를 포기하게 한다. 언제쯤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할 집을 얻게 될까. 출근길 죽 늘어선 세련된 고층 오피스텔, 갓 지어진 브랜드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좌절감마저 느껴진다.
그렇기에 이런 꼭지라도 빌어 내가 살고 싶은 드림 하우스를 꿈꿔 본다. 사실 ‘언젠가는…’ 정도로 상상하곤 하는 꽤 현실적인 꿈의 공간이 있다. 발단은 방콕에서 음식점을 운영한 동창의 이야기였다. 더운 것만 제한다면, 방콕은 그야말로 파라다이스라던 그 친구의 전언은 이미 두 차례 방콕에 다녀온 나로서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내용이었으니… 여행에서 실감한 방콕의 저렴한 물가가 실제 거주에도 적용되는지 궁금했던 터라 그의 2년 남짓한 방콕 생활을 이것저것 캐물었다.
대답인즉슨, 해외라고는 해도 그렇게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콕은 공동주거시설을 칭할 때 아파트보다는 ‘콘도’라는 개념으로 통용하며, 방콕 중심이나 번화가가 아니라면 한화 월 50만 원 정도로 20평 정도의 깔끔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다고 하더라. 더불어 너른 수영장과 입주민 전용 휘트니스 센터, 오픈 카페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니 그야말로 천국이 아닌가. 물질만능주의인 지금 시대에 적당한 돈으로 행복을 느끼기에 방콕만큼 좋은 도시가 있을까. 내가 꿈꾸는 황혼의 한 장면이란 방콕의 어느 콘도 옥상, 새파란 타일이 깔린 인피니피 풀 앞 선 베드에 누워 한가로이 책을 읽는 모습이다…
방콕 어딘가의 콘도
박진우(Graphic designer)
감성이 아닌…부동산 개념으로 접근해본다…
‘그곳’을 선정하기 위해 4가지 기준을 정해본다. 낭만, 출퇴근, 부촌 헤리티지, 20평대.
첫째의 기준은 낭만.
낭만은 하이퀄리티다. 효율성은 하이퀄리티가 아니라 가성비 밸런스를 맞추는 기준이다. 하이퀄리티란 효율을 포기한 낭만을 담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높은 천고 같은 거… 한정된 공간 속에 높은 천고는 효율적이지 않기에 소유주 입장에서 가성비를 못 뽑겠지… 쉽게 말해서 터무니없게 비싼 거. 낭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가치, 즉 여유를 베이스로 하기에 몹시 비싸고 희귀하다.
둘째로 출퇴근. 이태원과 한강진 사이에 위치한 사무실에 출퇴근이 용이해야 한다. 난 뚜벅이 대중교통맨이고,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하기에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소인 한남동주민센터(03-195)에 정차하는 버스가 지나다니는 곳으로, 또한 출퇴근 시간은 20분 내외가 이상적일 듯하다.
셋째로 부촌 헤리티지. 진짜로 살 게 아니라 희망사항을 적는 것이니까… 기왕이면 부촌이 좋겠다. 도시 정비도 잘돼있고 사는 사람들도 비교적 교양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여기서 부촌은 그냥 부촌 아니고 부촌 헤리티지 스피릿이 땅덩이에 밴 느낌의 동네로… 이런 부촌… 역사를 간직한 부촌.. 아마 동부이촌동, 한남동, 압구정동, 연희동 등이 아닐까. 평창이나 성북의 부촌은 너무 기사 딸린 집 느낌이라 제외한다.
넷째로 혼자 살기 너무 넓지도 너무 좁지도 않은 공간이다. 어차피 희망사항이니까 넉넉잡고 10평 후반에서 30평 미만으로 정했다.
결과 도출, 일단은 출퇴근 20분 컷이 가능한 마포 – 용산 – 성동 구간. 강남도 가능하지만, 자주가는 홍대, 합정에서 너무 멀어진다. 위 사항에 모두 해당하는 동네는 한남동이다… 한남동 내의 부촌 헤리티지를 간직한 아파트 단지… 얼마 전 소지섭이 61억 현금으로 매매한… 바로 한남 더 힐이다… 심지어 건축법상 높게 짓지 못해, 초고층 아파트가 아닌 점 또한 맘에 든다.
혹자: “한남 더 힐은 초대형이잖아. 넌 10평, 20평대라며”.
한남 더 힐은 신나게도 20평대가 존재한다. 공급 26평형으로 나온 한남 더 힐 131동 정도가 어떨까. 26평형은 A타입과 B타입이 있는데 거실이 더 넓고 방이 적은 A타입이 좋겠다. 심지어 사무실 앞에 정차하는 ‘110번 버스’의 정류소 또한 가까이에 존재한다. 재벌과 슈퍼스타들이 잔뜩 사는 한남 더 힐의 아침 풍경을 그려본다.. 모두들 수억 원대 최고급 차량을 타고 자신의 일터로 떠날 때 버스 정류소를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행복하다…
한남 더 힐 26평 A형
여창욱(Contributing Writer)
태어난 곳도 현재 사는 곳도 작은 도시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붐비고 차가 빽빽한 것이 일상인 서울 같은 큰 도시는 나에게 항상 버거웠다. 서울이든 지금 사는 곳이든 주변 사람들은 술 한잔하는 것을 즐겼고 특히 주말에는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마셔댔다. 즐거운 분위기는 나도 좋아했지만 오래 견디진 못했다. 스트레이트 엣지(Straight Edge)이기도 했고 사람들이 많은 곳보단 조용한 곳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항상 문화에 관련된 장소와 이벤트를 자주 찾아갔고 문래동의 GBN 라이브 하우스(GBN Live House)는 나에겐 없어서는 안 될 곳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거주지에 있는 작은 라이브 바에 동료 밴드를 부르는 공연 기획 일을 종종 하기도 했다.
이처럼 작은 도시에 항상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나에겐 굉장히 이상적인 거주지인데 일본의 고치시가 그러했다. 고치시는 높은 수준의 대도시는 아니지만, 시코쿠 지방에서는 규모가 큰 도시다. 다만 고치를 갔다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의 광역시보단 낮은 수준의 도시 환경이라고 한다. 이곳을 생각한 특정적 이유는 고치시 출신의 펑크 밴드 디스클로즈(Disclose)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보컬과 기타 멤버였던 히데키 카와카미가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이후로 밴드는 사라졌지만, 세계적으로 디비트(D-Beat) 스타일의 대표적인 밴드였기에 함께 세션을 했던 멤버가 상당히 많았고 디스클로즈 이외에도 다른 밴드들이 활동해온 터라 고치 펑크 신(Scene)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고치 로컬 신은 크지 않지만, 꾸준히 유지할 정도로 밴드 공연이 열러 해외나 다른 도시들의 밴드들이 투어를 하기 위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매년 카와카미의 기일에 맞춰서 기획하는 공연인 ‘Kawakami Forever’가 있어 고치 안팎의 펑크들이 카와카미 집을 방문해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묘지를 찾아가 참배하기도 한다.
고치시가 지방 도시다 보니 외부인에 대한 정이 넘쳐서 고치시를 갔다 온 주변 사람들은 현지의 펑크들과 쉽게 친해졌다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라이브가 있고 걸어서든 자전거를 타든 어디든지 닿을 수 있는 곳이기에 지금 나의 생활과 잘 맞기도. 게다가 바닷가 마을이란 점 또한 ─ 이곳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바다가 들린다” 실제 배경이다 ─ . 작은 동네에 살면서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즐길 수 있는 곳을 항상 동경했기에 가장 살고 싶은 곳이라면 고치시가 아닐까 싶다.
고치시(高知市)
심은보(Editor)
테슬라(Tesla) 최고 경영자,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스타트업 기업 ‘뉴럴링크’와 함께 인간 두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는 뇌 이식 기술을 개발해 내년에 인체 실험을 추진한다고 한다. 뉴럴링크는 ‘재봉틀 로봇’을 공개하며 쥐의 두개골을 열어 센서들을 삽입하고, 무선으로 정보를 전송받아 읽는 모습을 선보였다. 뉴럴링크의 다음 목표는 전신 마비 환자가 생각만으로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구독하는 정보, 테크 관련 매체와 각종 과학 매체는 이 기술의 가능성을 보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봉틀 기계’가 정보 전달을 위해 실을 박는 행위는 뇌에 충격을 가해 장기적으로 손상을 일으킬 거란 전망이 대다수다. 윤리적 부분과 생물학적 문제 등도 넘어야 할 벽.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까지의 예상일 뿐 해당 연구에 대해서는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오랜만에 전뇌에 관해 생각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시리즈 속 ‘전뇌’는 공각기동대 대원들이 ‘전뇌 통신’이라는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고, 이를 통해 생각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내가 전뇌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건 일본 만화 헌터x헌터에서다. 헌터x헌터 속 전뇌는 좀 더 나아간다. 등장인물은 “내게 여긴(현실) 현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윌리언 깁슨의 SF 소설 ‘뉴로맨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룬다. 작년에 본 ‘매트릭스’ 속 세계도 떠오른다.
‘매트릭스’를 본 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모피어스가 내게 다가와 파란 약과 빨간 약을 내밀면, 나는 파란 약을 고를 거다. 인터넷, 네트워크 안에서 사는 것은 내게 일종의 꿈과 같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진실이 뭐가 중요한가. 그보다는 인터넷 자체에 다이브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내 뇌를 몸에서 꺼내 컴퓨터와 연결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겠다. 유명한 생각 실험인 통속의 뇌처럼 말이다. ‘세컨드 라이프’가 이미 한 번 유행했던 세상에서 더 깊이 가상 현실로, 네트워크로 들어가는 걸 싫어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전뇌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