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안 마셔본 성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온 술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는 마신다. 매년, 주류 소비량 상위권을 지키는 한국. 그리고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술집.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는 어디를 가고 있나.
한지은 (Editor)
평소 새로움보단 익숙함을 선호하는 나는 매번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물색하기보다는 한 장소를 꾸준히 방문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좋은 장소를 찾고 또 그곳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작년 11월 서울에 상경한 나는 이와 같은 이유로 아직 서울에서 마땅히 자주 방문할 술집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술집을 고르는 데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건 아니다. 고려하는 점은 너무 시끄럽거나 너무 조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정도. 그 외 5000원짜리 소주, 오그라드는 문구의 네온사인 등은 사소한 기피 요인이다.
본가가 있는 부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퇴근 시간이 비슷한 친구와 꾸준히 방문하는 곳이 있었다. 그 빈도는 주 2~3회로 어차피 퇴근 후엔 ‘345(안주가 3000, 4000, 5000원대다)’라는 암묵적 약속이 있을 정도였는데, 1차든 2차든 마지막 목적지는 항상 이곳으로 통했다. 웹에 서면 345를 검색하면 가성비 갑이라는 타이틀이 주를 이루지만, 알고 보면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가게의 분위기다. 빠르게 없어지고 생기는 서면 내 여타 술집과 다른 길을 걸어온 듯한 이곳은 2013년부터 명맥을 이어 와 2010년대의 무드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처음 술을 접하게 된 시기를 추억하며 그 배경을 유지한 공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345는 내가 술을 처음 접한 2010년대 분위기를 담고 있어 좀 더 정이 간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동년배라면 반드시 이곳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싼 가격 덕분에 왠지 20대 초반 연령대가 주를 이룰 것 같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층의 손님이 방문하는 이곳은 앞서 언급한 소음의 비율 또한 꽤 적당하게 유지되는 편이다. 적당한 테이블 수와 간격으로 이뤄진 공간은 크리스마스와 전혀 관계없는 시기에도 미니 전구가 컴컴한 내부를 밝히는데 이게 또 괜히 연말 분위기에 훈훈하고 그렇다. 심지어 이곳에선 가끔 주사를 부리는 시끄러운 테이블이 있어도 마냥 밉지 않다. 안락한 장소가 주는 친근함이 사람을 한층 너그러워지게 한달까. 또 하나의 장점은 서비스 메뉴. 오뎅 덴뿌라를 비롯해 시키는 메뉴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른 서비스 메뉴를 제공하는 345에서는 정신없는 서면 여느 술집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온정을 느낄 수 있다. 워낙 싼 가격에 서비스까지 주는데 심지어 맛있기까지. 추천 메뉴는 야끼 우동과 고로케 및 튀김류다.
VISLA 에디터로서 첫 개인적인 글을 쓰는 거라 왠지 대단한 취향을 소개해야 할 것도 같았지만 나에게 345는 수많은 술병과 대화로 20대의 반을 함께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중한 장소다. 올해도 1월 1일을 이곳에서 맞았는데, 언제 가든 한결같은 이곳이 오래오래 유지되길 바란다.
박진우(Graphic Designer)
상수역 근처의 야키토리, 쿠시무라. 내가 주당은 아니어서 술집 데이터베이스가 적긴 하지만 몇 안 되는 술집 중 가장 좋은 기억이 많은 곳이 쿠시무라다.
장점을 읊어보자면.
첫째로 매우 맛있다. 10번 넘게 간 것 같은데, 닭이 비린 적이 거의 없었다.
둘째로 이곳만의 특징이라 할 수는 없지만, 야키토리의 특성상 하나를 시켜서 오랫동안 먹는 게 아니기에 줄줄이 나오는 메뉴를 기다리며 천천히 마시는 느긋함이 있다.
셋째로는 공간과 의자 간격은 좁지만 생각보다 시끄럽지 않다. 시끄러운 술집에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대화해야 하는 불편함은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왠지 선을 넘으면 사장님에게 혼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리미트가 있는 듯한 긴장감. 아주 좋다. 진상 손님을 한 번도 못 봤다.
넷째로 소주를 팔지 않는다. 이게 좋은 이유는 노코멘트할게요(비싼 소주는 팔더라).
다섯째로 하이볼을 판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소주나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메뉴다.
여섯 번째, 기본 안주로 나오는 양배추가 아삭하니 맛있다. 무슨 마법을 부렸을까.
일곱 번째, 근처에 헨즈 클럽과 모데시가 있다. 먹고 마신 후의 선택지가 명확하다.
여덟 번째, 바(?) 형태이기에 주방이 훤히 보인다. 오픈 키친이라고 하나… 이런 곳은 청결도와 요리 과정에 신뢰가 간다.
아홉 번째, 로고가 예쁘다. 매우 예쁘다. 볼 때마다 예쁘다. 카피일까. 아니겠지.
열 번째, 당연히 실내 흡연은 안 되지만 입구 바로 옆에 재떨이가 있다. 아마 재떨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바닥에 버리니까 갔다 놨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재떨이의 존재감이 사소하게 만족스럽다. 양철통 같은 게 아닌 진짜 재떨이다.
열한 번째, 이 지역은 사람이 붐비는 곳이 아니다. 아마 쿠시무라가 삼거리포차 근처였다면 분위기는 많이 달랐겠지.
열두 번째, 6호선 라인에 사는 나로서 쿠시무라가 상수역 근처라는 점이 매우 편리하다. 쿠시무라와 비슷한 느낌의 야키토리가 연남동 쪽에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가기 편한 쿠시무라를 찾게 된다(뚜벅이이기도 하고).
적고 나니 별 거 아닐 수도 있는 사소한 것이지만, 기본을 지키는 일과 디테일을 잡는 일은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은 법이니까…
마지막으로 굳이 단점을 하나 꼽자면. 좁고, 인기 있는 술집이다 보니 웨이팅이 항상 있다. 평일에는 몇 번 안 가서 모르겠다. 암튼, 웨이팅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은 쿠시무라 입장 대기열에 전화번호를 적고, 매우 가까운 곳에 조금 큰 술집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가서 안주 없이 하이볼 하나 천천히 마시며 연락을 기다린다. 괜찮은 방법이다.
권혁인(Editor in chief)
부끄럽지만 피 끓는 학창 시절부터 적지 않은 술을 마신 나로서는 ‘내가 좋아하는 술집’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마치 네이버 블로거들의 첨예한 평가만큼 단순히 세월을 버틴 자존심 이상의 무언가, 즉 내공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섰다. 그렇다면, 딱히 재지 않는 듯하면서도 꽤 변덕스러운 내 취향을 다시금 세심하게 나누는 작업을 선행해야 했다. 작금의 트렌드를 반영한 불호를 나열하자면 우선 핑크빛 네온사인으로 ‘넌 취할 때 봐야 더 예쁘다’ 따위의 문학성을 드러내 놓은 술집, 치즈에다가 엄청나게 매운 ‘불’ 뭐시기 섞은 요리를 대표 메뉴로 내건 퓨전 포차, 배달의 민족 폰트로 간판을 제작한 곳은 대부분 제외된다. 요즘에는 노포만을 골라 다니는 노포 탐험대부터 한 음식만을 골라서 격파하는 특정 음식 마니아 등 음식에 관련된 대중의 취향은 물론이거니와 그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이국적인 음식을 거의 현지의 맛에 가깝게 재현한 외국 레스토랑, 식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인테리어까지 전반적인 식문화 수준이 대폭 올라간 형국이라 나처럼 한낱 소주나 들이켤 줄 아는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 라이프스타일을 들이댈 문이 이미 좁아진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술집을 좋아하는가? 통계적으로 보자면 ‘동네에서 오랜 시간 영업한 곳’, ‘특정 콘셉트를 표방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인테리어’, ‘술을 사랑하는 주인장이 본인의 철학을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으로 드러낸 곳’ 정도가 되겠다. 너무 세련되거나 웹에서 인기몰이한 곳은 왠지 진득하게 마시기 부담되는 터라 앞서 언급한 요소를 갖췄으면서도 적당히 설렁설렁 영업하는 곳이라면 안성맞춤. 내가 사는 집과 사무실 근처인 한남동-이태원 일대는 사실 동네 장사보다는 주말에 놀러 오는 외지인을 상대로 한 가게가 많아 비싼 가격, 트렌드 칠갑, 작정하고 찾아온 방문객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은데, 그나마 보광동 일대에 터를 잡은 가게들은 운영하는 모양새가 퍽 자연스러워서 일행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종종 찾는 편이다.
보광동 일대의 정겨운 가게 중에서도 이번 기회에 소개하고 싶은 곳은 ‘카스 광장’이다. 기성 맥주 카스(Cass)를 취급하는 OB맥주에서 운영하는 술집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이곳의 안주나 분위기는 꽤 로컬적이다. 안주를 다양하게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후라이드 치킨, 오돌뼈, 돈까스, 황도, 노가리 등 주당이 드나드는 곳이라면 꼭 필요한 안주는 다 있는 셈. 특히 알 만한 사람이라면 아는 안주, ‘돈까스’는 이곳이 트렌드보다는 정통파에 가깝다는 징표. 이태원에 가까운 지역임에도 인플루언서/인스타그램 청정지역이라 괜히 신경이 분산될 이유도 없을뿐더러 술을 맛있게 먹고 있으면 주인 내외분이 기분에 따라 과일, 노가리 등 서비스를 내주니 마음이 갈 수밖에. 여기서는 제법 코가 비뚤어져도 부끄럽지 않고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도 안성맞춤이다. 와이파이, 해시태그 등 기타 술을 먹는 데 방해되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같이 간 일행과 다음날이면 까먹을 우정을 진하게 부딪히시라.
오욱석(Editor)
좋은 술집의 기준은 뭘까? 각자의 기호가 천차만별이겠지만, 개인적인 선호하는 술집의 우선순위는 용이한 귀갓길이다. 친근한 이들과 천하일미의 안주에 술을 즐기는 그 시간이 아무리 행복하다 한들 집에 오는 길이 고되다면, 쉽게 흥이 오르지 않는다. 택시비 생각에 전전긍긍하는 것도 좋은 술자리의 맛을 망치는 요인 중 하나다. 이런 연유로 늦게까지 마시고 푸지게 놀아도 느린 걸음으로 집까지 걸어갈 수 있거나, 만 원 안짝의 택시비로 안락하게 집에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자리한 술집을 찾아가는 편이다.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하자면, 너무 세련되지 않은, 적당히 캐주얼한 분위기랄까. 노포 마니아는 아니오나, ‘넌 취했을 때 존나 이뻐’ 따위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네온사인이 난무하는 술집은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그런 고로 요새 조금 맛을 들이기 시작한 술집이 한 곳 있다. 그 이름도 정겨운 ‘대나무 포차’라는 장소인데, 엄청나게 특별한 술집은 아니지만, 몇 가지 요소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곳이다. 일단, 그 상호에 걸맞게 포장마차 주변으로 작은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 운치가 그만이거니와 봄과 여름, 가을에는 야장으로 주변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고, 겨울에는 천막을 둘러 따스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 술잔을 기울이는 맛이 있다. 50가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메뉴 또한 대나무 포차의 강점 중 하나다. 타 술집과 비교했을 때 가격에 메리트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주변 종로3가 포장마차의 비싸고 적은 양의 안주에 실망했다면, 대나무 포차의 넉넉한 인심에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들 것… 심지어 마구잡이로 적은 메뉴가 의심쩍어도 그 맛은 출중하다는 게 반전이라면 반전일까. 개인적으로는 오돌뼈 볶음과 스팸 후라이전을 선호하나 주변 테이블의 관록 있는 주객은 해물짬뽕탕이나 해물홍합탕을 즐겨 드시더라.
아무튼, 이런 다양한 장점이 있는 이 술집을 작년에 퍽 자주 갔다. 마지막으로 간 건 지난 연말, 동갑내기 친구 둘과 함께 방문했지. 추운 겨울인데도, 포장마차를 두른 천막과 등유 난로 덕에 실내는 훈훈했고 우리도 그 분위기에 맞춰 신나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 밖에 사는 친구는 콜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했고, 이미 결혼해 즐거운 신혼생활을 보내던 친구는 와이프가 오기 전 집에서 기다려야겠다며, 타다를 불렀다. 나는 막차 버스를 탔다. 두어 정거장 전에 내려서 천천히 걸어 귀가한 후에 그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느낀 바를 일기로 짧게 적어냈다. 집에 와 펜을 드는 일이 드문데, 그날따라 느낀 게 많았나 보다. 이런 좋은 변화 역시 대나무 포차 덕이리라.
이번 에피소드를 끝으로 2018-2020년 사이 연재된 ‘에디터스 딜라이트’는 잠정적인 휴식기에 들어갑니다. 동시에, 새롭게 시작합니다. 2017년 연재된 ‘월간 영감’ 시리즈로 2020년을 채울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